청와대 오찬과 그 이후 새누리당 지도부의 행태를 보면, 시대는 변했어도 박근혜 정권의 당-청 관계는 과거 권위주의 시절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듯하다. 정상적인 판단과 대응이 불가능해 보이는 청와대에 이어 집권여당마저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현 시국과 민심을 누가 수습하고 국정운영을 제대로 해나갈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대통령이 국가원수라고 하지만 이는 외교·국방 분야에서 그러할 뿐, 국내 정치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상하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과거 권위주의 시절 대통령이 겸했던 집권당 총재직을 없애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7일 청와대 오찬에서의 새누리당 지도부 발언을 보면, 입법부의 다수당 지도부가 대통령 신하가 되길 자처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자’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한몸’이라는 아부성 발언만 판을 칠 뿐, 국민 관심이 쏠린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과 청와대 운영에 대해선 일언반구 비판의 말이 없다. 심지어 1990년대부터 비공식 자리에서도 사라졌던 ‘대통령 각하’란 표현까지 여당 원내대표는 스스럼없이 썼다.

김무성 대표가 “이번 기회를 통해 잘못된 건 시정하자”고 스쳐 지나가듯 말한 게 거의 유일한 ‘쓴소리’였다고 하는데, 그런 두루뭉술한 말 한마디로 끝나도 될 만큼 새누리당은 지금 상황을 한가롭게 보고 있는 것인가. ‘비선 국정농단 의혹’을 둘러싸고 여론은 악화할 대로 악화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청와대 진짜 실세는 진돗개”라는 박근혜 대통령 농담에 박장대소나 하는 당 지도부는 대통령의 애완견이라 불려도 딱히 대답할 말이 궁할 것이다.


이러니 오찬 다음날부터 여당 대응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8일 아침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선 비선 의혹을 어떻게 해소할지에 대한 논의 없이 야당을 향한 세찬 공세만 무성했다. 전날 ‘각하’란 표현으로 대통령에게 코드를 맞췄던 이완구 원내대표는 “야당이 청와대 비서실까지 무더기로 검찰에 고발한 건 정치 금도를 넘은 것이고 국정마비라는 상황까지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했다. 다수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방패를 자처하는 행위 자체가 삼권분립의 ‘금도’를 넘었고, 국정마비를 가져오는 핵심 원인 중 하나가 집권여당의 무능·무소신이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나마 “이번 논란이 국정운영 투명성을 높이고 소통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초·재선 의원 모임 ‘아침소리’의 기자회견이 여권 내 거의 유일한 다른 목소리인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지금 상황이 야당의 정치공세만 그치면 평온해질 거라고 정녕 믿고 있는 것인가. 민심엔 귀를 닫고 대통령 해명만 가슴에 품는 태도를 국민이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보았는가. 여당 지도부는 스스로 물어보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칼럼] 나를 어루만져준 두 젊음

● 칼럼 2014. 12. 16. 20:31 Posted by SisaHan

죽음이 이렇게 내 곁으로 숱하게 지나간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연초에 동갑내기 둘이 세상을 뜨더니 봄에는 세월호에서 여리디여린 학생 수백명의 참혹한 죽음을 몸이 저며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보아야 했다. 가을 들어 선배 후배 친지 학자 시인 등 인생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사람들을 줄줄이 떠나보냈다. 죽음을 많이 볼 나이가 되었구나 싶었지만 죽음이 나이순이었던 것도 아니어서 황망함 또한 커져갔다.
아침 산책길에 청운동 자치회관 앞에서 세월호에서 진 어린 학생들의 사진이 찬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방긋이 웃고 있는 얼굴들을 눈에 익혀두고 싶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찌 저리 여리고 해맑은 아이들을.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매번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세상 또한 그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절망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값싸고 너절하기 짝이 없는 권력싸움과 세상살이의 모진 사연들이 허망하기도 해서 하루하루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다가올 한해가,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젊고 따뜻한 두 남녀를 만났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세상이라면…. 그들은 황폐한 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고 나오는데 젊은 여자가 쫓아왔다. 머뭇머뭇하며 다가온 여자는 추운 겨울 칼바람 속에 서 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혹시 교회 다니셔요?”라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형 교회와 장사꾼 목사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토해내고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전도할 생각이 날까라는 생각이 스쳐 안 다닌다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쭈뼛쭈뼛하며 더욱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은 교회로 나오셔요 대형 교회만 그래요 작은 교회로 오면 돼요……, 여자는 울먹거렸다. 영화를 보고 아마 영혼이 통째로 뒤집어졌을 젊은 여자는 그래도 저건 하나님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와 목사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는 거니까 들어달라고 간절한 눈길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 때문에, 그 간절하고 슬픈 눈길 때문에, 만약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을 혼자 지나가야 하는 절대적 순간이 올 때 그 눈빛을 기억하고 존재의 소멸보다 따뜻한 빛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다른 젊은이, 그는 스물다섯살의 신학생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은 호스피스센터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족과 본인의 허락을 얻어 찍은 말 그대로 가감 없는 현실이었다.


신학생은 속세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했고 그래서 휴학을 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곳곳에서 유쾌한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외로운 사람과 말벗도 해주고 마술을 가르치기도 하고 간간이 막걸리도 나누어 마시면서 평균 21일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마련해주고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없다. 확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면서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고 착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을 속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몇몇 돌보던 이들이 죽은 다음에 그는 호스피스 병동을 나온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배낭 하나 메고 다시 저 속세의 모두 죽을 날을 받아놓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들과 다시 부딪쳐 보자고 다짐한다. 그가 다시 신학교에 돌아갔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온갖 장식과 불빛으로 예수님 오신 날을 한달 내내 기리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젊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한다.
2000년 전의 예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같이 사는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야 마는 그 진정한 마음이 예수의 의미이고 그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한다.
< 김선주 - 언론인 >



[평신도 글마당] 기독교인과 술

● 교회소식 2014. 12. 16. 20:27 Posted by SisaHan

2014년 올해도 연말이 다가 왔다. 연말이 되면 각종 모임이 이루어 진다. 모임마다 회식이 있는데 회식에는 음료수로 술이 함께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는 술이 없으나 믿는 자와 불신자들과 함께하는 모임에는 대부분 술과 함께 회식을 하게 된다. 회식 술에는 포도주 아니면 맥주 또는 소주가 대부분이고 특별히 순도가 높은 위스키를 종종 마시는 경우도 있다. 술 마시는 격식도 국가마다 다르다. 우리나라 경우는 서로 술을 부어주며 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미주의 대부분 국가에서는 본인이 알아서 자기가 마실 수 있는 술의 양을 잔에 부어 마신다. 이를 사람들은 술의 문화라고 부른다. 술이 나오는 회식에서 술을 멀리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절 하기가 매우 쑥스럽다.


본인이 매번 겪는 경우지만, 처음 뵙는 분께 거절은 때로 당황스럽다. 왜냐하면 그분의 반응이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저는 술을 못 마신다고 하면 남자가 술도 못 마시는 좀팽이라 할 것이고 체질에 안 맞는다고 하면 한잔 정도는 괜찮다고 권한다. 계속 거부하면 성의를 무시 하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술 먹는 자기는 죄인과 같고 술 안마시는 당신은 선인이라고 곡해하기 쉬워 거리감을 갖게도 한다. 교인답게 저는 교회 나가는 교인입니다 하고 거절하면 바로 역으로 다음과 같은 반응의 공격을 받는다.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셨을 뿐 아니라 물로 술을 만드셔서 마시게끔 하신 분이며 지금까지도 포주로 성만찬식 하고 계시지 않느냐 하고 직격탄이 날아 온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므로 예수님이 가나 혼인찬치에서 술을 만드시기도 마시기도 하셨으니 이것도 순종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성경말씀을 좀 아는 분의 질문이다. 맞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공 생애를 시작한지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 혼례장에서 있었던 첫 표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혼례장의 손님들에게 마시게 하셨다. 이로 인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써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2참조)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또예수님은 포도주를 마셨음을 시인하셨다(마26:29). 가나 혼인찬치에서 술을 만드신 것은 육신의 어머니의 부탁으로 이루어졌으며 유대민족의 음식문화가 절대적인 율법주의로써 술로 문제가 야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기적은 제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 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만드신 술로 인해 불상사가 발생하였다면 예수님에 대한 불평과 불신으로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회식에서 술 권함을 받을 때 상대방에 거부감을 주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거절하는 것이 매우 좋다.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주신 보리와 포도로 만든 음료수인데 마시고 싶으나 인간이기에 예수님과 같은 절제가 없으므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계속 먹게 되고 주량도 늘어나 언제고 술로 인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이는 교인으로써 있을 수 없어 술을 멀리하고 있으니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술을 멀리 해야 할 이유는 술은 마실수록 회수가 늘어나고 독한 술을 찾게 되어 정신과 마음을 흐리게 하여 모든 감각을 마비상태로 이어간다. 따라서 술로 인해 음욕과 탐심 그리고 불만에 대한 반항 등 폭력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특히 우리 음주문화는 술을 많이 마실수록 호걸이라 부르는 관습도 있고, 또한 술의 유혹으로 술이 술을 마신다. 결국 음주운전을 하고 의사가 만취 상태에서 환자를 수술하는 등의 불상사도 발생한다. 자신의 파멸은 물론 상대방 가정까지 파멸을 초래 하는 등 사회악의 큰 문제가 된다. 또한 술에 중독되면 폐인 또는 사망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하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되어 간다면 자기 신앙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가 있겠는가? 반드시 술을 멀리해야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술잔을 드시고 축도 하시면서 이는 나의 피,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확실한 언약의 피이므로 항상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묵상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마시는 술이니라.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

< 이승고 - 토론토 영락교회 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