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WHO DO YOU THINK YOU ARE?

● 칼럼 2013. 11. 10. 20:07 Posted by SisaHan
WHO DO YOU THINK YOU ARE?
- 당신은 누구인가? -

올해 노벨문학상을 캐나다의 엘리스 먼로(Alice Munro)가 수상했다. 나로서는 조금 뜻밖의 일이었다. 캐나다 문학, 특히 소설을 공부하며, 3명의 여류 작가에 대해 글을 쓰려고 준비한 적이 있었다. 마가렛 로렌스(Margaret Laurence), 마가렛 에드우드(Margaret Atwood), 엘리스 먼로의 세명의 작가에 대해서였다. 내가 보기에는 비교적 캐나다의 소설이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심한 경우 그 존재마저 의심받지만, 이 세 명의 작가가 그런대로 문학적 가치가 있는 작품을 썼고, 캐나다의 소설을 대표하지 않나 생각 들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THE DIVINER’와 ‘THE STONE ANGEL’을 쓴 마가렛 로렌스가 가장 훌륭한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오래 전에 투병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했다.

마가렛 에트우드는 오래 전부터 국제적으로 알려져, 캐나다 작가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소설가이지만, 시인, 문학 평론가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 ‘THE HANDMAID’S TALE’은’ 시녀이야기’로 오래 전에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다. 그런 이유로 캐나다에서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면 마가렛 에트우드가 아닐까 생각했다. 엘리스 먼로는 이번 수상자로 예상되기는 했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녀는 주로 단편소설만을 써왔기 때문이다. 장편은 되고 단편은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여지껏 주로 장편 소설이 노벨문학상에 뽑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처음에는 단편으로 시작하여 장편으로 옮겨 가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생활 꾸준히 단편소설을 쓰는 경우도 드물다. 아마 장편이 베스트셀러로 팔려야 돈이 되는 경제적 이유가 아닌가 생각하며, 요즘 단편을 발표할 지면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스 먼로는 온타리오 주위 윙햄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고, 런던에 있는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을 다녔다. 그녀의 작품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쉽지 않다. 몇 편의 장편이 아닌 수백편의 단편소설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마디로 요약하자면, 마치 자신의 체험담을 이야기하듯, 특히 성장과정을 이야기하듯, 일상적인 생활 속에 한 소녀가 또는 여자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부닥치는 일들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강의 시간에 어떤 학생이 그녀의 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체험담이라고 우기던 일이 생각난다. 그럴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그녀의 작품의 특징이다. 장편과는 다른 단편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단편의 성격상, 영웅보다는 소시민의 일상을 그리기 쉬운 법이다. 그런 까닭에 큰 사건이나 큰 인물은 없다.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이며, 그녀는 화자로 일인칭 ‘나’를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경험담으로 착각하기 쉽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많은 소설들이 그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는지 모른다.

내가 처음 접한 그녀의 책은 ‘WHO DO YOU THINK YOU ARE?’이다. 이 소설집은 재미있는 것이 단편집이지만, 각기 다른 단편이 이어져서 하나의 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온타리오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란 소녀가 여류 소설가가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그렸다. 그런 이유로 그녀의 일생에 관해 쓴 자서전처럼 오인하기 쉽다. 십여 편의 단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마저 로스(Rose)로 똑 같고, 소설의 순서마저 나이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성장과정을 보여준다.

소설집의 제목이 상징적이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공부할 당시만 해도(90년대 초), 캐나다 문학의 제일 중요한 주제는 정체성이었다. 캐나다 문학은 과연 존재하는가? 물었듯…. 사실 영국문학과 미국문학이라는 두 거인들 틈에 끼어 미미한 존재였던 것은 사실이다. 엘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없던 캐나다 문학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더욱 분명한 모습으로 세계 문학 한 가운데 서리라 생각한다.

< 박성민 - 소설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동포문학상 시·소설 부문 수상 >


[한마당] 정의와 양심의 수난

● 칼럼 2013. 11. 10. 20:04 Posted by SisaHan
“우리는 과연 전체주의적 색깔이 농후한 ‘조직’만이 있고 ‘양심’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에서 ‘한국 종교와 철학’을 12년째 가르치며 자신의 이름도 아예 한국식으로 고친 한국통 학자인 박노자(Vladimir Tikhonov) 교수가 한국정부의 ‘전교조’ 불법(법외노조)화 선언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교직사회에서 전교조가 ‘양심’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전교조 교사들은 고질적인 사학 비리에 맞서왔고, 또 촌지와 같은 악질적 관행의 근절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바른 것을 교육하려 노력하는 등 학원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학생들에게 양심을 가르치는데 힘써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단체를 법 밖으로 내모는 것은 국제노동기구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양심에 따른 행동을 제재함은 물론 동료를 배신하고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가르치지 말라는 탄압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의 말대로 한국은 이제 양심이 불가능한 사회로 급속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양심을 지키며 핍박을 받느냐, 아니면 양심이니 정의니 하는 고상한 단어는 접어두고 당장의 안락한 삶을 위해 조직외압에 타협해 버리느냐는 고민의 기로에서 번민해야 하는 사람들이 단지 교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 행사에 겹겹이 에워싸여 양심의 갈등을 겪는 소시민, 소직업인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에라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잠시 마음이 불편해도 무사히 살 것이라는 편안함의 유혹은 대다수의 삶을 옭아맬 수밖에 없다.
 
거대한 정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단초가 된 댓글수사로 영-욕(榮辱)의 격랑에 휩쓸렸던 권은희 수사과장은 경찰관 신분으로 양심이냐 정의냐, 눈감고 굴종이냐의 기로에 섰을 근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경찰조직이라는 유무형의 압박 속에서도 결연한 선택을 했다. 불법을 덮는 거대권력에의 순응이 정의가 아닌 이상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안된다는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했다. 검찰은 물론 청와대와 국정원을 포함해 더 큰 권력의 압박에 대항한 소신수사로 역시 영욕의 희비를 겪은 윤석렬 검사 또한 수사법관의 양심으로 조직의 부정의(不正義)를 고발했다. 
당사자들의 육성고백은 없어도 그들이 얼마나 심한 고충과 심적 갈등에 시달렸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조직과 권력의 생리를 모를 리 없고, 조직논리를 거스른 자가 걸어야 할 길이 가시밭길임은 수많은 권력의 희생자들이 앞서 걸으며 입증했기에 그렇다. 
‘양심선언’의 시대와도 같았던 90년대, 재벌들의 비위와 감사원의 은폐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 그는 양심을 지킨 죄로 ‘국가기밀 누설죄’ 라는 엉뚱한 죄목으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국군보안사가 사찰한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해 재야, 종교계 인사 등 1300여명의 개인 정보와 기록을 담은 디스크를 들고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군과 동료들의 질시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92년 군 부재자 공개투표 등 군내 부정선거를 고발한 이지문 중위도 불명예제대에 취업이 막히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조차 무차별 도감청을 폭로하고 최근 러시아로 임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비롯해, 이라크전 기밀문서로 전쟁의 무모성에 경종을 울린 브래들리 매닝 일병 등 내부의 양심적인 고발자들은 똑같이 험한 수난을 당하고 있다. 
부정과 부패의 고리 단절과 사회정의를 깨우치는 지대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 흔한 공로상 한번 주었다는 이야기도 못듣는다. 한낱 ‘용기있는 비양심 사회의 희생자’들로만 기억되는 비정하고 불의·부도덕한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용감한 양심의 사람들이 대우 받기는커녕 ‘배신자’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태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양심적 선언과 행동들은 비정상적이고 후진적인 상황, 정의롭지 못한 정치현실에서 이뤄진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나오지 않는 게 상식이다.
정의와 도덕률, 심지어 진리마저 ‘내게는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으로 아전인수 적용과 이기적인 강요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더럽히는 권력의 행패. 화려하게 포장된 민주주의 문명국 뒤안길의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 묵살과 추잡한 전체주의적 양태들이 빚어내는 양심과 도덕의 실종 현상들이다.
어려서부터 “정의롭게 양심적으로 살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일류대에 들어가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돈 많이 벌어라”라는 교육이 자리잡은 지금,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양심적인 것인지 ‘정의와 양심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세상이니, 갈수록 양심행동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정의를 향한 양심의 고독한 싸움은 소중하고 위대하며, 마땅히 대우받아야 한다. 한 마리 제비가 봄소식을 알리듯, 긴긴 겨울에도 어김없이 희망의 전령이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와 정의의 생명력을 기억하며-.
 
< 김종천 편집인 >


국방부가 지난해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담은 DVD를 이용해 장교와 일반 병사들의 정훈교육을 시킨 사실이 드러났다. 국가보훈처의 안보교육 빙자 DVD와 마찬가지로 군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란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국방부 교육정책국은 지난해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비판하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을 ‘일방적 퍼주기’로 매도하는 등 편향적 내용의 DVD로 정훈장교와 일반 병사 등에게 교육을 시키고 이를 토대로 시험까지 치렀다고 한다. 11개 묶음의 DVD를 1100여 세트나 제작해 각 군에서 교재로 사용했다니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DVD도 국가정보원이 넘겨줬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정원과 군, 새누리당이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한 이른바 ‘3각 연계’ 의혹이 점점 짙어지고 있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국정원 심리전단과 국군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이 함께 새누리당 SNS미디어본부장의 글을 퍼나른 사실은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사이버사 요원들이 국정원 심리전 교육과정에서 파견교육을 받는가 하면 양쪽 요원들이 지난해 8월 말 비슷한 시기에 ‘MB스타일 동영상’을 누리집 게시판 등에 올린 것도 연계 의혹을 뒷받침하는 방증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한 검찰과 국방부의 수사가 게걸음을 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늑장수사와 축소수사로 사실상 증거인멸을 방조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선거개입 혐의 사이버사 요원만 18명인데 겨우 7명만 조사하고 있을 뿐 국정원과의 연계 등 다른 의혹들에 대해선 파헤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 역시 수사팀장 교체 이후 수사 확대는커녕 공소유지에 급급한 형편이다.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장과 차장검사는 수사 의지를 의심받는 상황이어서 검찰 안팎에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철저한 조사와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는 대로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했으나 ‘철저한 조사’라는 전제 자체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축소·은폐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결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법원이 국정원 심리전단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글 5만여건에 대한 공소장 변경 신청을 허가한 데 이어 다른 SNS계정도 추가 확인되고 있다. 인터넷 댓글과는 규모와 내용 면에서 대선개입 정도가 확연히 다른 글들이 확인된 이상 일반 요원들을 모두 선처한 검찰조처가 맞는지 의문이다. 끝까지 혐의를 부인하는 국정원 인사들의 뻔뻔한 태도를 보면 수사를 전면 확대하고 시효가 지난 선거법은 아니더라도 국정원법 등 다른 죄목을 적용해 엄중 처벌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