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역사를 망각한 시대착오적 행위, 개탄"
다카이치 총리는 공물, 현직 방위상 직접 참배
“다카이치 총리의 영령에 대한 마음 불변”
국가 책임과 가해 역사 덮으려는 ‘영령 타령'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쟁범죄자 14명도 합사
강제합사 한국인 2만 1000여 명 유족들 소송
일본 최고재판소, 청구 기한 지났다며 기각
그럼에도 유족들의 소송은 오히려 늘어나

 

8월 15일,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우익 단체 회원들이 일본 국기와 플래카드를 들고 전몰자를 추모하고 있다. 2026.8.15. 로이터 연합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일(‘종전기념일’)인 15일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대신(방위상)을 비롯한 현직각료와 집권 자민당 핵심간부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또한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도 스즈키 슌이치 간사장을 통해 ‘다마구시료’(玉串料. 신사 제사의식에 내는 공물과 신주에 대한 사례비)를 냈다.

 

이날 도쿄 구단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직 각료(국무위원)로서는 고이즈미 방위상 외에 기가와타 히토시 어린이·여성정책담당상, 오노다 기미 외국인정책담당상 이 직접 참배했으며, 이로써 현직 각료들의 패전일 야스쿠니 참배는 7년 연속 이어졌다.

 

이에 한국과 중국 등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만행을 겪었던 나라들은 거세게 비판하고 나섰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외교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정부는 일본의 과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범죄자를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또다시 공물을 봉납하거나 참배를 되풀이하는 등 역사를 망각한 시대착오적인 행위를 한 데 대해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일본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이 역사를 직시하고 과거사에 대한 겸허한 성찰과 진정한 반성을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외교부도 대변인 입장 자료를 통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군국주의의 정신적 도구이자 상징"이라고 지적한 뒤 "이는 역사적 정의에 대한 모욕이자 문명의 기본 규범에 대한 도전이며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이 8월 15일 일본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전몰자를 추모하고 있다. 2026.8.15. 교도 로이터 연합
 

“다카이치 총리의 영령에 대한 마음은 불변”

 

자민당 핵심간부들로는 스즈키 간사장 외에 아리무라 하루코 총무회장, 니시무라 야스토시 선거대책위원장이 참배했으며, 원래 참배할 예정이었던 고바야시 다카유키 정조회장은 자신의 지역구 치바현의 폭우피해지를 둘러보기 위해 이날 참배를 미뤘다.

 

스즈키 간사장은 참배 뒤 다카이치 총리의 다마구시료를 대리로 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총리가 자민당 총재로서 사비(개인 돈)로 다마구시료를 냈다며 “다카이치 총재의 평소 영령에 대한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총무상과 경제안보상 재임 중에는 매년 패전일에 계속 참배했으나, 2024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입후보했을 때는 기자들에게 “내심, 마음의 문제다.앞으로도 (참배를) 계속하고 싶다”며 총리에 취임하더라도 참배를 계속하겠다는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2025년 10월 총리 취임 뒤에는 올해 4월의 춘계례대제(봄철에 일본 각지 신사에서 올리는 주요 제사행사) 기간을 포함해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참배하지는 않았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참배 뒤 기자들의 질문에 응하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떠났다. 그는 농림수산상, 환경상 시절을 포함해서 매년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2025년 10월 방위상 취임 뒤의 기자회견에서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분들에 대해 존숭의 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전(不戰)의 맹세를 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8월 15일,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도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본 국회의원들이 신토 사제를 따라가고 있다. 2026.8.15. 지지통신 AFP 연합
 

아사히 “중국과 한국의 반발 피할 수 없을 것”

 

일본 패전일에 방위상이 참배한 것은 2024년에 기하라 미노루 당시 방위상(지금은 관방장관)이 참배한 이후 두 번째이며, 그 이전에는 2021년에 기시 노부오 당시 방위상이 패전일 이틀 전에 야스쿠니를 참배했고, 방위성이 성으로 승격되기 전인 2002년에는 나카타니 겐 방위청장관이 패전일에 야스쿠니를 참배했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현직 방위상의 야스쿠니 참배에 중국과 한국이 반발할 것은 필지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책임과 가해 역사 덮어 감추는 ‘영령’타령

 

이와 관련해 포토저널리스트(사진작가) 야스다 나쓰키 D4P 부대표는 아사히에 기고한 논평에서 “다카이치 총재의 평소 영령에 대한 마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한 스즈키 간사장 말을 겨냥해 “‘천황을 위해’ 전사하면 ‘영령’이 될 수 있다고 선전하면서 전쟁에 동원한 국가폭력의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다는 것인가. ‘영령’은 그런 국가책임과 가해의 역사를 덮어 감추려는 말로 기능해 오지 않았나”라고 비판했다.

 

야스다 부대표는 또 식민지 지배 때문에 일방적으로 ‘황국신민’이 돼 가족들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야스쿠니에 ‘합사’된 (조선)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며 “이런 역사적 경위까지 포함해서 (진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면, 각료와 총리의 참배를 ‘내심, 마음의 문제’로 왜소화하고 바꿔치기할 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8월 15일 '모두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국회의원 모임' 소속 의원으로 참배한 오노다 기미 외국인정책담당상. 2026.8.15 아사히신문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쟁범죄자 14명도 합사

 

야스쿠니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총리를 비롯한 A급 전범자 14명도 합사돼 있다. 이들은 ‘쇼와 순난자’ 명목으로 1978년 10월 17일 합사됐으며, 이는 일본정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도쿄 전범재판 판결을 사실상 부정하고 그들을 애국순국자로 추모함으로써 일제의 전쟁범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14명은 도조와 함께 사형당한 도이하라 겐지 육군대장·관동군 관계자, 마쓰이 이와네 육군대장·중지나 방면군 사령관, 무토 아키라 육군 중장·군무국장, 히로타 고키 총리·외무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 육군대장·관동군 참모장, 기무라 헤이타로 육군대장·버마 방면군 사령관, 병사한 도고 시게노리 외무대신, 그리고 종신형을 받은 고이소 구니아키 육군대장·총리, 우메즈 요시지로 육군대장·관동군사령관·참모총장, 시마다 시게타로 해군대장·해군대신 등이다.

 

고이즈미 방위상 야스쿠니 참배의 5가지 문제

 

아사히는 고이즈미 방위상의 야스쿠니 참배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5가지로 정리했다.

 

먼저 ‘A급 전범’들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에 현직 방위상이 참배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짚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예전 군국주의 시절(일제) 정신적 지주였던 국가신도의 중심적 시설이고, 극동국제군사재판(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 등 연합군이 주도한 전범 처리 ‘도쿄 재판’)에서 ‘A급 전쟁범죄자’로 판정받은 14명이 합사돼 있다. 일본 방위성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육해공 3자위대의 야스쿠니 신사 ‘부대(군대) 참배’를 금지하고 있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사인(개인)’ 입장에서 하는 참배임을 강조하지만 그가 국가조직의 수장이라는 점은 지워질 수 없어 사실상 자위대원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부추기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두 번째로, 고이즈미 방위상의 발언을 문제삼았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참배 뒤 기자들의 취재에 응하지 않았으나, 2025년 10월의 방위상 취임 때는 기자회견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분들에 대해 존숭의 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부전의 맹세를 하는 것 자체는 어느 나라에서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야스쿠니 참배를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기 위한 당연지사라는 강변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전의 농림수산상, 환경상 시절을 포함해 매년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그의 아버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2001년 총리 취임 뒤 매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해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경색시켰다. 특히 총리 퇴임 직전인 2006년에는 8월 15일 패전일 당일에 참배했는데, 현직 총리가 패전일에 참배한 것으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 21년만의 일이었다.

 

세 번째, 특히 지금 악화일로인 중국과의 관계에 끼칠 영향에 대해 짚었다. 다카이치 총리의 지난해 10월 ‘대만 유사시’ 관련 국회 답변 이후 중일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다카이치 정권의 방위력(군사력) 강화에 대해 ‘신형 군국주의’라며 거듭 비판해 왔다. 일본은 중국에 동조하는 나라들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면서 중국의 주장을 부정하는 대응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 고이즈미 방위상의 참배를 근거로 중국이 일본의 ‘신형 군국주의’ 비판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81주년 광복절을 맞아 서울 보신각 앞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끝장 낸 것을 기뻐하며 참가자들이 세 차례 만세를 외치고 있다.환호를 보내고 있다. 2026.8.15 AP 연합
 

한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 우려

 

네 번째, 한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에 대한 우려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참배가 ‘양호한 기조’ 위에 있는 한국과의 관계에도 찬물을 끼얹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취임 뒤 한국의 안규백 국방장관과 여러차례 회담하고 한국 공군기의 오키나와 급유 지원 등 ‘방위협력·교류를 조금씩 진척시켜 왔다.

 

일본은 자위대와 한국군간 연료 등의 물자를 원활하게 상호융통할 수 있게 하는 ’물품역무 상호제공협정‘(ACSAㆍ상호군수지원협정)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 한국에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배를 배경으로 특히 ’진보(혁신)계‘의 이재명 대통령 지지층에서 일본과의 방위협력 강화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뿌리 깊다. 고이즈미의 참배는 이런 과제를 한층 더 복잡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다섯 번째로 고이즈미의 정치적 행보로 인한 대외관계 악화 가능성,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외무성 등 관련 부서의 우려다. 외무성 관계자는 고이즈미 참배와 관련해 “중국과의 관계는 이미 악화될대로 됐으나 문제는 한국이다. 양호한 분위기가 끝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고이즈미는 방위성의 우두머리이자 장차 총리 후보 물망에 올라 있기도 한 정치가다. 총리관저의 관계자는 “공인으로서의 방위상 역할보다 우파의 지지라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날카롭게 비판했다.

 

강제합사당한 한국인 2만 1000여 명 유족들 소송

 

한국과는 일제 강점기에 강제동원당했다가 사망한 수만 명의 한국인(조선인)들을 본인은 물론 유족과의 상의도 없이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령‘들을 제사지내는 야스쿠니 신사에 일방적으로 합사한 중대한 문제가 문제가 있고, 이를 둘러싼 유족들의 합사 폐지 및 배상 요구 소송 제기로 재판도 진행 중이다.

 

자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어서 정확한 수를 확인할 순 없으나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는 ’2만 1000여 명‘의 조선인 강제동원 전몰자들이 합사돼 있다. 대다수는 식민지배 시절 일본군의 군인, 군속으로 강제동원당했다가 전사한 사람들이다.

 

조선인 전몰자들의 야스쿠니 합사는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으나 일본 패전과 군국주의 해체 뒤인 1959년에 1만 9650명이 한꺼번에 합사되면서 그 차원과 의미가 달라졌다. 조선인 합사는 한일 국교정상화 1년 전인 1964년에도 82명이 합사되는 등 1975년(509명)까지 계속돼 왔다.

 

문제는 일본의 일방적인 합사와 그에 대한 유족들의 반발이다. 유족들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조선인 전몰자 합사가 본인과 유족들의 동의 없이 일본정부의 자료와 결정을 토대로 일방적으로 이뤄졌다고 반발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이후 유족들은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와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며 잇따라 소송을 제기해 왔다.

 

일본 최고재판소 청구기한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

 

2025년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유족들 27명의 상고를 기각했다. 그 근거는 ’제척기간‘이었다. 1959년에 합사된 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국가배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얘기다. 이는 “야스쿠니 신사 합사가 정신적인 피해를 안겨 주지 않았다”고 적극적으로 판단해서가 아니라 20년이라는 기간 제한으로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 최고재판관들 중엔 이에 대한 다른 의견을 낸 재판관도 있었다. 미우라 마모루 재판관은 유족이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합사로 사망한 근친자들을 경애하고 추모하는 평온한 정신생활이 방해받을 수 있다며 “유족의 고통에는 법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이번 청구에 대해서는 제척기간 문제가 있다”며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진상규명과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매번 이런 제척 사유 등을 들이대며 거의 모두 배상 불가 판결을 내려 왔다.

 

8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욱일기 문양의 옷을 입은 남성들이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81주년을 맞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전몰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2026.8.15. 로이터 연합
 

그럼에도 유족들의 소송은 오히려 더 확대

 

지금도 소송은 진행 중이다.

2025년 9월 제3차 소송에서 한국인 유족들 6명은 도쿄 지방재판소에 새소운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에는 ’손자 세대‘가 처음으로 원고로 나섰다.

요구 내용은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명부 등에서 고인들의 이름을 삭제할 것”, “합사에 대해 사죄할 것”, “일본정부의 정보제공 행위에 대해 책임 질 것”, 그리고 “손해를 배상할 것” 등이다.

 

2025년 12월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송이 제기됐다. 12월 23일 한국인 유족 10명이 서울 중앙지법에 제소한 이 소송은 야스쿠니 신사의 한국인 합사에 대해 한국 법원에 제소한 최초의 소송이다. 원고 쪽은 일본정부와 야스쿠니 신사를 상대로 합사 취소와 총액 8억 8000만 원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원고 쪽은 사전합의 없는 일방적 합사가 인격권과 추모 애도의 자유, 양심과 종교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한다.

 

또 올해 6월에는 재일동포 3세 여성이 처음으로 합사 취소 소송에 참여했다. 이 여성의 경우 조부모 형제 2명이 일본해군 군속으로 강제동원돼 전사했다는 사실과 그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조사를 통해 확인한 뒤 제소했다.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소송문제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기각으로 끝난 게 아니라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법정투쟁이 한국에까지 무대를 넓혀가면서 손자 세대까지로 확대되고 있다.              < 한승동 기자 >

 

민문연 "안상호 친일...친일파 기득권 대물림 성찰해야

 

이토 히로부미 추모, 대정친목회 가입 등 행적
『친일인명사전』 빠진 건 기준에 못 미쳤기 때문
등재 안 됐다고 친일파 면죄부 주어진 것 아냐
전문직을 모두 배제했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

 

임종국 "친일 행위보다 반성 없는 태도가 문제"
박유하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 빚은 결과"
배기성 "어떻게 '오욕을 끌어안으라' 말하는가"
"조봉암 손가락 잃은 사연 안다면 그럴 수 있나"

 

광복절 81주년을 하루 앞두고 일제강점기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 관련 논란에 대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최근 언론 및 온라인 공간을 통해 배우 하영(본명 안하영)의 증조부 안상호(1874∼1927)의 친일 행적과 후손들의 언행에 대한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는 것이 계기가 됐다.

 

민족연구소는 대체로 사실에 부합하지만 일부 과도한 해석이나 오류가 있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나고 『친일인명사전』에 안상호의 이름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면서 안상호의 실제 행적과 역사적 사실관계를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보도자료는 세밀한 내용으로 짜였다.  ▲ 안상호의 주요 친일 행적 ▲ “어떤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에 대해 ▲ “친일인명사전에서 전문직은 모두 다 뺐다”는 주장에 대해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 ▲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 연좌제적 비난 경계와 구조적 성찰의 필요성 등이다.

 

연구소는 먼저 안상호가 대한제국 관립일어학교와 도쿄 자혜의원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전문직 의사였지만, 화려한 이력 이면에 다음과 같은 친일 · 부일 협력 행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라고 정리했다. 

 

● 일제침략의 원흉 이토 추도 :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조직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실제 추도회가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관민추도회와 별도로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식민통치 및 수탈기구 참여 :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한 지방행정 보조기구인경성부 협의회원(1914, 1918, 1920, 관선 임명직)을 역임했다. 또 식민지 금융수탈기구인 경성 종로금융조합의 조합장(1922∼1927)을 지냈다.

● 내선융화 및 친일단체 활동 : 경성신사의 씨자총대(신도 대표, 1915), 내선융화 단체인 대정친목회(대정실업친목회) 평의원(1916), 반일운동 배척을 표방한 동민회 회원(1924) 및 평의원(1925∼1927)으로 활동했다.

● 동화주의의 내면화: 『매일신보』(1918.12.10.) 기사에서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일본 사람과 똑같다”, “조선 사람과 상관이 없다”라며 밝히는 등 일제의 동화정책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인물로 소개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일선동화'의 모범가정으로 소개된 안상호의 가족 사진. 1918년 12월 10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안상호는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 지금 조선 옷은 한 벌도 없고, 매운 음식은 조금도 못 먹는다"며 "다섯 자녀들은 일본어만 쓰고 조선말은 전혀 하지 못한다. 조선 사람과는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합

 

「왕세자전하(王世子殿下) 가례(嘉禮) 전에 일선동체(日鮮同體)의 가정방문(家庭訪問): 전연(全然)히 내지화(內地化)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

-> 安商浩씨는 일선동체의 가정을 만드는데도 제일 먼저 성공의 기를 들었다. (중략) 기자는 먼저 살림 재미를 물었다. 안씨는 ‘그렇지요 별수 있나요 나는 무엇[무릇]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나는 지금 조선옷은 한 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먹어요. 일본사람과 똑같지요. 그러하니까 불편한 점은 조금도 없어요. (중략)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어요. (중략)’ 안씨는 지금부터 열두해 전에 의친왕이 동경에 계실 때에 의친왕의 시의로 있었는데 그때에 씨의 부인 磯子와 서로 알게되어 기자부인의 모친에게 청혼을 하여 전후 열한해 동안 고락을 같이 하였는데 (중략) 자녀가 모두 5남매이며 (중략) 안씨가 도리어 아내를 따라서 일본사람이 된 셈이다. (중략) ‘나는 조금도 조선사람하고 상관이 없으므로 일본에 사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고 열 한 해 동안을 조선에 있었어도 조선말은 한마디도 못해요’

 

물론, 대정친목회와 동민회에 이름을 올렸다고 친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신중론을 펴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대정친목회는 고문 이완용 · 민영휘, 회장 조중응 등 거물 친일파들을 중심으로 조선인 전직 관료 · 귀족 · 대지주 · 실업가들이 결집하여 ‘내선융화’를 표방하며 결성한 단체다. 

 

조선인의 단체 결성과 결사 활동이 극도로 억압되던 1910년대 무단통치 아래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1930년 전시체제기에 반강제적으로 조직된 전쟁협력단체와는 결성 배경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 조선인 단체로는 종교단체를 제외하면 대정친목회가 거의 유일했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친일 엘리트의 모임이었던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자와 일제 당국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했다. 나아가 3·1운동 전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통치(민족분열책)를 획책할 당시, 대정친목회는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민족의 저항 의지를 무력화하는 정신적 · 사회적 협력기구로 기능했다. 이들은 3·1운동을 반대하고 일제 통치에 순응하면서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한편, 산업의 발달과 문화 향상을 내세우는 개량주의적 ‘실력양성론’을 펼쳤다.

 

안상호는 이 단체의 평의원(1916.11.29)으로 명단이 확인된다고 밝힌 연구소는 시대적 상황과 단체의 성격을 고려할 때, 평의원(일종의 대의원 격)으로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친일 행위라고 강조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부 유튜브 방송 등에서 “친일파인명사전 708명에서 전문직(의사, 변호사) 이런 사람들은 다 뺐다”, “시대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었다”는 취지의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전하며 두 가지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원은 총 4389명이다. 한 방송에서 언급된 “708명”은 2002년 광복회가 자체 선정한 692명에 국회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의원모임)이 16명을 추가하여 발표했던 ‘친일파 708인 명단’을 혼동한 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이 전문직을 일괄 배제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해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문화·예술·종교·법조·언론·교육 등 각 분야 친일 인물이 다수 등재되어 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기준에 따르면, 기술직이나 전문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 수록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복수의 친일협력단체에 가담했거나 지속적이고 능동적인 부일 행적이 입증된 전문직 인사는 엄격한 심의를 거쳐 사전에 수록하였다. 즉, 핵심 기준은 친일행위의 자발성·반복성·지속성과, 식민통치기구 내 특정 지위(귀족, 중추원, 고등관, 경찰간부, 군장교, 친일단체 간부급) 여부였으며, 전문직 여부는 면책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안상호의 경우, 단순한 의료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경성부 협의회원, 대정친목회 및 동민회 평의원,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등 식민통치기구와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지식인과 전문직 인사들의 친일은 사회적 영향력과 이데올로기 확산 효과가 막대했다는 점에서 결코 그 역사적 책임을 가볍게 볼 수 없다.

 

자연스럽게 친일파 명단마다 수록 인원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 차이는 기준의 자의적 왜곡 또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니라, 조사 주체의 성격, 조사 목적, 법적‧학술적 기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8년 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인신 구속과 공민권 제한 등 직접 처벌을 목적으로 출범했으나, 이승만 정권의 조직적 방해와 경찰의 특위 습격으로 조기 와해되었다. 2005년 출범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는 법적 행정처분이 따르는 국가기구였기 때문에 지위 자체보다는 엄격한 행위 입증에 집중하였고, 입법 당시의 여야간 절충 등 태생적 한계로 인해 규모가 1006명에 머물렀다.

 

반면 민간 학술단체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반민족행위자만이 아니라 부일협력자까지 포함하였으며, 식민통치를 지탱한 고등관료, 고등경찰, 군 장교 등 ‘지위범’을 포함하고 만주 등 해외 지역까지 범위를 확장하였으며, 지식인과 전문직의 역사적 책임을 가장 포괄적이고 엄정하게 물었다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안상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연구소는 강조했다.  『친일인명사전』 수록 여부는 편찬위원회의 선정 기준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지속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뒤 결정했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축적한 자료로는 안상호의 친일 행적이 선정 기준에 미달했기 때문에 편찬위원회의 결정으로 수록을 보류하였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해방 60여 년 만에 결실을 맺은 사전 편찬 작업은 당시 축적된 학술 연구 성과와 사료의 한계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인력과 자료 부족으로 인해 판단이 보류된 인물도 다수 존재했다. 『친일인명사전』을 비롯한 과거사 기록 사업은 완료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료의 발굴과 검증을 통해 ‘보유편’과 ‘개정증보판’으로 이어지는 현재진행형 학술 사업이다. 새롭게 확인되는 관보, 신문 기사, 단체 명부 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학술 검증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라고 연구소는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논란의 본질에 대해 배우 개인이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조상의 식민지 협력 이력에 대한 최소한의 역사적 성찰 없이 발언하여 대중에게 상처를 준 ‘역사인식과 성찰 부재의 문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조상의 과오를 성찰 없이 미화하거나 무비판적으로 소비한 태도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역사적 과오에 대한 법적·정치적 책임은 행위 당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원칙이며, 선대의 과오에 대한 단죄를 후손에게 전가하는 연좌제적 발상은 민주 사회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연구소는 분명히 했다. 그러나 강성현 교수가 지적했듯, “어떤 제도가 그 이력을 씻어주었나… 이 질문들이 ‘연좌는 안 된다’는 한 문장에 막혀버릴 때 가장 크게 손해 보는 쪽은 친일 청산이라는 의제 자체다”라는 경고를 새겨야 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단순히 ‘후손에 대한 연좌제 금지’라는 방어 논리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식민지배 하에서 형성된 전문직 계보와 사회적 자산이 해방 후 청산 없이 어떻게 기득권으로 승계되고 세습되었는지에 대한 구조적 질문과 역사적 성찰로 이어져야 마땅하다는 것이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린 결론이다.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사무처장은 지난 13일 YTN 라디오 '장성철의 뉴스명당'에 전화로 출연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싣는 기준, 검증 문제, 이번 논란의 의미와 파장 등을 짚어봐 눈길을 끌었다.  방 처장은 이번 논란이 불거진 파장의 의미를 묻는 진행자에게 "연초부터 우리는 스타벅스 탱크 데이, 배재고 사태를 겪지 않았나?" 되묻고 "지금도 우리는 그 문제가 비단 배재고 야구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지 않나?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하영 씨의 행동이나 태도가 적절치 않았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고 있는가. 이렇게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돌아보는 한 방법으로는 올해 초 네덜란드에서 약 4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돼 화제가 됐던 일을 떠올렸다. 독일 역시 1000만 명의 나치 당원 명부가 공개됐다. 독일 인구 6명 중의 한 명정도가 나치 당원이었다. 그 명단이 언론사 <디 차이트> 홈페이지에 공개돼 독일 사람 누구라도 볼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이렇게 명단을 공개하는 뜻은 '저 집안은 나치 당원 집안이야'라고 지목하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찰하는 계기, '우리 할아버지가 집안에서 인자한 어르신이었는데 역사적으로 이런 악행에 가담했거나 방관했구나' 이렇게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태도로 사건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방 처장은 "평생을 친일파 연구에 바친 임종국 선생께서 살아계셨다면 오늘의 하영 씨 논란에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 묻는 진행자에게 "이런 어록을 남기셨다. '친일했던 일제 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반성과 화해,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더 문제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철저하게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사의 기강은 헛말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바꾸지 않는다면 민족 사회에서 우리는 부끄러운 조상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이 요즘 상황에 적절하지 않나 싶다"고 답했다.

 

아울러 방 처장은 "앞서 모범적인 사례가 있다. 한 여배우(이지아)는 처음에 할아버지가 친일파로 등재돼 있어서 억울해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연구소를) 찾아와 저희와 함께 그(할아버지의) 행적을 함께 공부를 했다. 그 분은 지금도 계속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상의 행적을 반성하고 있지 않나?"고 되묻고 "연예인은 어쨌든 공인으로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런 공적인 태도가 필요하고, 하영 씨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성숙하고 훌륭한 배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배우 하영과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넷플릭스와 연합 자료사진  

 

논란이 일파만파로 번지자 '제국의 위안부'로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까지 나섰다. 박 교수는 11일 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당대 최고의 의사" 안상호를 둘러싼 친일 논란을 두고 "친일 강박증과 순결 강박증이 빚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안상호에 대해 "조선의 양의 1호이자 대한제국 1호 국비유학생으로, 대한제국이 만든 인재였다"고 소개한 뒤 "귀국 후 순종 주치의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고 부도 따라왔을 것"이라며 "친일로 쌓은 명예라기보다 스스로의 실력과 국가의 지원으로 의료계 파이오니아(개척자)가 된 이로 보인다"고 적었다. 특히 안상호가 을사오적 이완용을 치료한 이력과 관련해서는 "이완용이 아니라 서민이라도, 가능하다면 당대 최고 의사였던 그에게 치료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아픈 사람이라면 실력 있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한 발 나아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도층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정치·경제·문화·교육 모든 분야에서 리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교육부터 활동까지 구조적으로 친일파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들을 부정한다면 일제시대 내내 인재를 키우지 말았어야 했다"며 그렇게 한다면 조선인 정치가와 기업인, 학교장 등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된다고 지적했다.

 

또 하영을 비판하는 이들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인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수십만명이 모였다는 지원병 지원자들 가운데 당신의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창씨개명을 신청한 조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또 자신이 이런 발언을 하는 이유를 "규탄부터 하고 보는 당신의 폭력이 한 사람을 사정없이 죽이는 걸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순결 강박, 친일 강박증이 이 모든 걸 만든다"며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부터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역사 강사 배기성 씨는 13일 유튜브 채널 '최욱의 매불쇼'에 나와 "과거 일본군 병사와 위안부가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고 망언을 늘어놓은 박 교수가 또다시 수많은 일본 식민지배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씨는 특히 "치유하려면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는 태도" 운운한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희생된 많은 이들을 참담하게 모욕하는 언동이라고 격분했다.

 

재판정의 죽산 조봉암. 그는 늘 의수였던 일곱 손가락을 가리기 위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마치 결박당한 것처럼 보이는 자세로 앉아 있곤 했다. 

 

그는 죽산 조봉암이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받을 때 왜 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는지 아느냐고 진행자 등에게 묻고는 일곱 손가락을 잃은 사연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만주의 교도소에서 7년 수감돼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첫사랑이었던 아내가 옥바라지를 하다 동사했다는 소식을 전하던 일본인 간수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게 만들었으니 너 같은 존재는 목숨을 끊는 게 낫지 않느냐'고 모욕하자 흥분해 이로 손가락들을 끊었는데 실제로 끊어졌다는 것이다. 너덜너덜해진 손가락들을 당국이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그 상태로 지내다 감옥을 나와서야 어렵사리 의수를 마련해 손가락들을 감춘 채 살아갔다는 슬픈 얘기를 전했다. 

 

배 강사는 "이런 잔인하게 슬픈 얘기들을 안다면 어떻게 감히 '오욕을 내 것으로 끌어안으라'고 망발을 늘어놓을 수 있느냐"고 따져물었다.

 

당연히 누리꾼들의 박 교수 비판도 이어졌다. 한 누리꾼은 "시대적 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업을 수행한 '구조적 친일'과는 다른 문제"라며 안상호가 당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고 의복과 음식, 생활방식 등을 일본식으로 했다고 자랑한 것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생계형 협력과 자발적 내선일체를 같은 선상에 놓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안상호처럼 최초의 서양의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김필순, 이태준, 박서양 등은 근대 의학을 배운 엘리트였지만 망명과 의료 활동, 독립운동 지원의 길을 선택했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만으로 모든 행적을 덮기는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다른 누리꾼은 "그럼 독립운동가들은 물욕이나 명예욕이 없어서 목숨 걸고 항일했느냐"며 "시대가 지났다고 친일 매국노들이 이해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할 대상"이라고 비판했다.                                                     < 임병선 기자 >

 

프란체스카 홍의 도전과 '민주적 사회주의'의 미래

● WORLD 2026. 8. 16. 09:5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석패 속에서 빛난 한국계 노동자 워킹맘의 도전
경합주 위스콘신의 돌풍과 기득권의 집중 공세
내외부 억압 뚫어낸 선명한 공약과 풀뿌리 운동

 

본선에서 더욱 필요한 반기득권 후보의 경쟁력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의 급진적 결합의 과제
민주적 사회주의와 진보정치 미래에 던진 화두

 

민주당 주지사 후보 프란체스카 홍이 2026년 8월 11일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열린 예비선거 개표 방송 시청 파티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
 

프란체스카 홍(Francesca Hong)이 0.4% 차이로 민주당의 위스콘신주 주지사 경선에서 패배했다. 여러모로 너무나 아쉬운 소식이다. 승패라는 단순한 수치적 결과에만 얽매여 홍이 얼마나 수많은 악조건과 걸림돌 속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고 의미 있는 정치적 성과를 거둔 것인지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번 경선은 단순한 당내 경쟁을 넘어, 풀뿌리 진보좌파 정치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인 역사적 변곡점이었기 때문이다.

 

홍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그의 정치가 왜 커다란 진정성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홍은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요리하던 노동자 출신에 대학 졸업장도 없이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집 없는 세입자였다. 온갖 좌절과 방황을 이겨낸 홍의 삶을 살펴보면,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본 이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홍은 2011년 공화당 주정부의 공공부문 노동권 박탈 시도(스콧 워커 주지사의 단체교섭권 박탈 법안)에 맞선 투쟁에 노조원인 부모를 따라 참가하며 급진화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미국 민주적 사회주의자(DSA, 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조직에 가입하고 위스콘신주 하원의원도 됐다. 현장 노동자로서 겪은 삶과 투쟁이 그를 정치의 주체로 일어서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번에 홍은 위스콘신의 민주당 주지사 후보로 도전했다. 학벌도, 정계 인맥도, 자산도 없고,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완전한 아웃사이더였지만 말이다. 더구나 위스콘신은 미국 중서부의 대표적인 스윙(경합) 지역으로 민주당의 힘이 크지 않았다. 전체 인구에서 백인 비중이 압도적이고 아시아계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1950년대 반공주의 마녀사냥을 이끈 조셉 매카시의 고향으로 그 어두운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위스콘신 노동조합들의 프란체스카 홍 지지 포스터 

 

이곳에서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밝힌 아시아계 여성의 도전 자체가 기적이었고, 보수적 압력에서 멀지 않은 미국 중서부의 한복판에서 기존 정치의 프레임을 정면으로 깨뜨린 사건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홍이 선거운동 과정에서 순식간에 민주당에서 지지율 1위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원래부터 진보적이고 민주당 강세 지역인 뉴욕에서 조란 맘다니의 급성장을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진보 요새가 아닌 위스콘신에서 이름 없던 아시아계 여성 사회주의자가 주지사가 될 수 있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지지자들의 기대와 반대자들의 공포가 제기됐다. 기득권 체제의 오랜 성벽에 균열이 생기자,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뜨거운 열기와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의 저항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흐름을 차단하려는 트럼프와 공화당의 필사적 공격은 당연했다. 그들은 아직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지도 않은 홍을 '극단적 공산주의자', 심지어 '지하디스트'라고 선제 공격했다. 공화당뿐 아니라 대부분의 주류 언론들은 홍에게 부정적이었고 10년 전 SNS까지 뒤지며 작은 말실수나 흠집을 찾아내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다 건너 한국의 조선일보까지 이런 공격에 동참할 정도였다. 언론들은 먼 과거의 발언들을 맥락 없이 낱낱이 잘라내어, 그를 '위험한 과격파'로 몰아세우는 공세를 펼쳤다. 문제는 미국 민주당의 기득권 주류도 이런 공격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홍이 '믿을 수 없는, 불안한, 본선에서 패배할' 후보라는 공격이 계속됐다. 당내 보수·중도파는 진보적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집요하게 의심했다. 

 

프란체스카 홍을 공격하는 조선일보 - 관련 기사 화면 갈무리

 

그들은 출마를 포기했던 사람(데이비드 크롤리)을 다시 불러서 홍을 막을 후보로 세웠고, 민주당의 토니 에버스 위스콘신 현 주지사가 앞장서 크롤리를 도왔다. 에버스는 '만약에 홍이 이기면 도와야 하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 자금도 홍보다는 크롤리에게 압도적으로 몇 배나 더 많이 몰아줬다. 예컨대 홍은 소액 다수의 후원금을 힘겹게 모아서 광고비로 50만 달러를 쓰는 동안 크롤리는 400만 달러를 쓸 수 있었다.

 

즉 민주당 주류는 위스콘신의 지지자들에게 사실상 '홍을 찍지 마라'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따라서 이런 여러 악조건과 걸림돌 속에서도 홍이 크롤리를 거의 이길 뻔하다가 0.4% 차이로 아깝게 패배한 것은 놀라운 일이고 큰 성과라고 보는 게 맞다. 자금과 조직의 거대한 열세를 메우고 이처럼 바짝 추격할 수 있었던 동력은 오직 홍의 선명한 주장과 공약이었다.

 

홍은 무상 공공보육, 공공교통, 공공식료품점, 주거비 안정, 최저임금 20달러, 학자금 대출 탕감, 주 32시간 노동제, 부유세 강화, 이민세관단속국(ICE) 폐지, 이스라엘의 가자 학살 반대 등을 약속하고 주장했다. 특히 시민들의 불만이 큰 데이터센터 건설 중단을 약속한 유일한 후보였다. 지금 미국에서 데이터센터는 일방적으로 건설되면서 수도요금과 전기요금을 폭등시키며 빅테크 기업들에만 이익을 안기는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홍은 "이런 상황에서 ‘점진주의’는 무책임하다. ‘큰 위기’에는 그에 걸맞은 속도의 ‘큰 해결책’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며 급진적 방향을 분명히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을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되찾아가는 더 큰 운동의 일부"라고 규정했다. 홍의 선거운동은 거대 자본이 아닌 대중의 능동적 참여로 채워졌다. 선거 자금은 부족했지만 홍을 지지한 자원봉사자 7천여 명은 14만 번 가까이 집들을 방문해 문을 두드리고 대화를 하며 직접 지지를 호소했다.

 

변두리와 농촌 지역까지 가서 노래 모임과 음식 행사를 찾아다녔다. 민주당 지지자의 30%가 스스로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답하는 여론조사가 나오는 상황에서, 이런 급진적 공약과 풀뿌리 선거운동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슬아슬한 패배가 이러한 의미와 성과를 삭제할 수는 없다. 사실, 11월 본선을 위해서도 홍은 크롤리보다 더 나은 후보였다.

 

색깔론을 펴며 '좌파 척결'을 선포하던 트럼프 - 관련 방송 갈무리

 

스윙(경합)주는 좌도 우도 아닌 중간이 아니다. 그보다는 어느 당에도 충성하지 않으며 반기득권 정서가 큰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기득권 양당 체제에 환멸을 느낀 무당층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2016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버니 샌더스가 이긴 곳이 위스콘신이다. 따라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지지하는 트럼프 충성파 MAGA주의자인 공화당 후보 톰 티파니를 꺾기 위해서도 홍이 민주당의 후보가 될 필요가 있었다.

 

크롤리는 체제의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표심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상징성이 약하고, 기득권에 맞서기보다 그 일부로 보이는 게 사실이다. 그 점에서 버니 샌더스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같은 DSA의 전국적 스타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홍을 지지하며 선거운동을 돕지 않은 것은 아쉽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얼마 전에 이들이 지지했던 진보 후보의 과거 막말과 성폭력 의혹 등이 드러나면서 사퇴한 아픈 기억 때문에 더욱 몸을 사리게 됐다는 평가가 있다. 경합주에서 무당층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거리를 뒀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홍이 "나는 전국 DSA의 강령을 전부 지지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도 있다.

 

홍이 '추수감사절 폐지', '경찰 예산 삭감' 등의 과거 SNS에 올린 과격한 발언과 말실수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바로잡지 못하면서 거리를 두게 됐다는 말도 있다. '정체성 정치'보다는 '계급과 민생 정치'가 중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 전쟁보다는 생계비가 중요하다'는 이런 식의 대립 구도는 다소 기계적이고 일면적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이나 카멀라 해리스가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여성과 인종을 내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신자유주의나 이스라엘 집단학살 지지와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정체성 정치'와 '계급 정치'는 얼마든지 급진적인 방식과 내용으로 결합될 수 있다. 조란 맘다니는 무슬림 이민자 소수인종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노동계급의 삶의 문제와 고통을 대변했다. 노동계급의 '민생' 문제 안에서 정체성을 포섭하는 것은 가능하다.

 

완전히 새로운 뉴욕시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맘다니 당선자. AP 연합

 

사실 홍이 과거에 '추수감사절 폐지'나 '경찰 예산 삭감'을 말한 구체적 맥락을 살펴보면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 실제로 추수감사절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학살과 수탈을 '화합과 감사'로 포장하면서 시작된 역사를 숨기고 있다. 또한 조지 플로이드 등 흑인들이 경찰 폭력으로 죽어가던 상황에서 중무장 경찰과 감옥에 쓰이는 돈을 줄이고 정신보건, 주거, 빈곤 구제를 위한 복지 인프라에 투자하자는 주장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물론, 이것이 이해나 동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주장과 정책을 반드시 그대로 고집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홍은 과거의 그런 주장을 철회하거나 톤 다운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은 계속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서 집요하게 파고들며 프레임을 전환하려 했다. 그런 공격에 함께 맞서지 않은 것이 더 문제일 수 있다. 왜곡된 프레임 공세 앞에 수동적으로 물러설 때, 공격과 프레임은 더욱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그만큼 샌더스나 코르테스같은 이들의 선택은 더욱 아쉽다.

 

결국, 이번 위스콘신에서 벌어진 논쟁과 평가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바람이 민주당 주류의 훼방을 뚫고 뉴욕 같은 진보적 대도시뿐 아니라 경합 지역까지 더 넓게 퍼져나가기 위한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로 이어진다. 진보 정치가 전통적 거점에 머무르지 않고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경합 지역으로 확장하기 위해 치러야 할 정치적 기회비용과 전략이 질문의 핵심이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DSA는 '당선 가능성'을 위해 과거의 '급진적 발언과 지향'들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삭제하거나 바로잡아야 할 것인가?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며 전진해 나가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도 정해진 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명성을 유지하면서도 광범위한 대중적 동의를 획득하는 균형점을 찾으며 힘을 모으는 일은 진보 좌파가 직면한 고도의 정치적 과제이다.

 

"한국인에겐 저항의 피가 흐르고 있다", "우리도 여기서 [한국의 대통령 탄핵 같은] 그런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과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트라우마와 회복력의 역사"라고 말하던 프란체스카 홍의 이번 도전과 성과는 미국을 넘어서 진보 좌파 정치운동 일반이 언제든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이런 고민에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0.4%의 차이로 막을 내린 선거 결과는 실패가 아니라, 모든 진보적 운동이 돌아봐야 할 중대한 이정표로 남았다.

                                                                                            < 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

 

 

북한, 최근 러시아에 탄도미사일 40기 추가 제공

 구매하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EPA=연합]

 

북한과 러시아가 오는 11월 말까지 러시아에 파견되는 북한군 규모를 5만명으로 늘리는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고 교도통신이 우크라이나 국방부 정보총국 자료를 인용해 13일 보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북한과 러시아는 약 석 달에 걸쳐 북한의 파병 규모를 현재 1만명 수준에서 5만명으로 늘리고,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접한 러시아 서부 3개 주에 북한 병력을 배치한다는 구상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통해 기존에 서부 3개 주에 있던 러시아군을 우크라이나와 접전 지역에 재배치해 올해 안에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점령하려는 의도로 풀이됐다.

 

기존에 러시아 서부 쿠르스크주에 주로 주둔하던 북한군의 배치 범위를 쿠르스크주와 인접한 브랸스크·벨고로드주까지 확대한다는 구상으로 전해졌다.

 

북한군에 서부 국경 방어를 맡기고 자국 군대를 교착 상태인 돈바스 지역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러시아의 목적으로 보인다고 교도통신은 해설했다.

 

우크라이나 정보총국 당국자는 북한과 러시아가 지도자 차원에서 이 계획을 최종 승인할 전망이라고 전했다.

 

이는 최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가 북한으로부터 병력 3만명을 추가로 파견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접경지 배치를 준비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25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는 북한으로부터 3만명 추가 파병을 원한다. 6월부터 러시아 보로네시 지역에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 이후 같은 주장을 반복해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지난 9일 우크라이나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처음에는 수백 명에 관해 얘기했지만, 수천 명으로늘었고 이제는 북한군 3만∼5만명을 러시아 영토에 배치하기로 결정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정보총국 조사에 따르면 현재 러시아 내에 파병된 북한 지상군은 약 9천500명으로 파악된다.

 

이 밖에도 북한은 최근 미사일 부대 소속 90명을 러시아 보로네시주로 파병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최근 신형 KN-23, KN-24 탄도미사일 40기와 운용 인력을 러시아에 추가로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미사일들은 지난달 30일과 이달 11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우크라이나 정보총국 안드리 체르니악은 북한 미사일 부대가 러시아 서부 보로네시주에 이미 배치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이 이달 초 전했다.

 

체르니악은 약 90명으로 구성된 북한 미사일부대가 해당 지역의 러시아 제112미사일여단에 배속될 것이며, 러시아 측은 북한 탄도미사일 최대 120기와 발사대 6기의 배치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작년 8월부터 러시아에 제공한 미사일은 약 150기로 추산된다. 

                                                                                                  <  이도연, 조성미 기자>

 

 

 

"협박과 식언, 가짜 뉴스를 지렛대 삼는 것은 실패한 전략"

 
 구매하기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  [EPA 연합]

 

대미 종전 협상에서 이란 측 협상단장을 맡고 있는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 바꾸기'를 조롱하며 비판했다.

 

갈리바프 의장은 6일(현지시간) 소셜미디어 엑스(X)에 "'대규모 공격이 임박했다… 잠깐, 취소. 그들이 협상을 원한다'"라고 쓰고 "이는 무한 반복되는 쇼 외교(theater diplomacy)"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협박과 식언, 가짜 뉴스를 지렛대 삼는 것은 실패한 전략"이라며 "현실을 직시하고 약속을 이행하라. 우리에게 더 이상의 쇼는 필요 없다"고 강조했다.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의 X 메시지  [X 캡처]

 

호르무즈 해협 통제권을 둘러싸고 최근 미국과 이란이 무력 충돌하고 이후 중재국을 통해 간접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 진전이 있다는 이유를 들며 대규모 공격 계획을 전격 취소했다.

 

반면, 이란은 미국과 협상에 선을 그으며 오만과의 호르무즈 협상에만 집중한다는 상반된 입장을 밝혔다.                                                              < 김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