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주권은 양도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
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 셰인바움 취임 1년
트럼프, 수출품에 최고 30% 관세 부과해

"멕시코, 절차와 기술적 양보 거래했을 뿐
"트럼프식 세계에선 이중 게임 여지 작다"
룰라 정부 '전략적 모호성'에 우려 표명

이재명, 룰라와 셰인바움 특징 모두 갖춰

 

"단호한 실용주의"(Assertive pragmatism). 국제 컨설턴트인 기욤 슈나이더 박사는 '단호한 실용주의 대 전략적 모호성: 트럼프의 미국에서 멕시코와 브라질'이란 2일 자 <모던 디플로머시> 기고를 통해 동맹국, 경쟁국을 가리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관세 폭력'에 대한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3) 멕시코 대통령의 접근법을 이렇게 표현했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의 접근법은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으로 규정했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3) 멕시코 대통령이 취임 1년을 맞이한 1일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 10. 01 [AFP=연합]

 

트럼프, 수출품에 최고 30% 관세 부과했지만
"멕시코, 분노 아닌 절제된 단호함으로 대응"

 

이 글에서 슈나이더 박사는 "트럼프의 미국은 적응하든, 저항하든, 재조정하든 선택을 강요받는 익숙한 위치로 라틴 아메리카를 되돌려 놓았다지만, 이 지역의 두 거인, 멕시코와 브라질은 너무도 다르게 대응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관세 부과와 이민·마약 단속 등 중남미에 전방위 압박을 가하는 '트럼프 2기 미국'에 대처하는 것에 그는 "멕시코는 일찍부터 게임을 읽었다"면서 "멕시코는 과잉 반응을 하는 대신에 '단호한 실용주의'를 택했다"고 해석했다. 구체적으로, 트럼프가 멕시코 수출품에 최고 30%의 관세 부과를 발표했을 때, 멕시코는 "분노가 아닌 절제된 단호함으로 대응했다"라는 게 슈나이더의 평가다.

 

셰인바움 정부는 일시적이지만 공급망 보존과 시스템 충격 완화를 위해 대미 협상을 통해 90일간의 관세 유예를 얻어냈지만, 그만한 대가도 치렀다. 신속한 범죄인 인도, 마약 단속 협력 강화, 일부 비관세 장벽 철폐 약속 등이 그것들이다. 이에 슈나이더는 "핵심은 멕시코가 절차와 기술적 양보를 거래했을 뿐, 결코 주권은 양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방적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협력을 (일종의) 화폐로 전환했다"고 풀이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2일 워싱턴 백악관 로즈 가든에서 열린 새로운 관세 발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5.4.2. AP 연합

 

"멕시코, 절차·기술적 양보 거래했을 뿐
결코 주권은 양도하지 않았다는 게 핵심"

 

안보 의제에서도 멕시코는 무기 추적, 국경 검문, 정보 공유에서 더 긴밀한 협력을 허용했지만, "종속이 아닌 협력"의 원칙을 따랐다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워싱턴은 가시적 성과를 얻고, 멕시코는 대내외에 '자율성'을 과시하는 상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관세 90일 유예엔 "단순히 숨 쉴 공간 이상"이라는 그는 내년으로 예정된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 재검토를 앞두고 "축적되는 정치적 자본"이며, 조약이 재개될 때, 멕시코는 협력 기록을 제시하며 협정의 지속을 정당화하고 더욱 징벌적인 재협상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할 수 있다고 봤다.

 

슈나이더는 '상호 의존'이 멕시코의 최대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북미 제조업 회랑은 멕시코의 노동력, 물류, 지리적 근접성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멕시코는 전술적 기동을 통해 긴장을 식힘으로써 트럼프의 무역 국가주의가 자동차 생산, 전자 산업, 농업 비즈니스를 흔들지 않도록 보장한다"며 "이것이 단호한 실용주의의 숨겨진 힘이다. 즉, 멕시코의 진정한 지렛대인 구조적 통합을 보호하면서 시간을 버는 능력이다"라고 설명했다.

 

올해 3월에 미국의 관세 압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조직하고 그것을 트위터에 게시한 멕시코 셰인바움 대통령  

 

멕시코 첫 여성 대통령 셰인바움 취임 1년
"미국 압력에 어조는 정중, 메시지는 단호"

 

앞서 슈나이더는 반년 전 '멕시코의 전략적 상승'이란 <모던 디플로머시> 기고(4월 3일)에서도 멕시코 연방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인 셰인바움이 트럼프와의 관세 협상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어조는 정중했고, 메시지는 단호했으며, 결과는 멕시코가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협상하는 법을 배웠음을 보여줬다. 관세가 다시 부과될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멕시코는 변덕스러운 파트너와도 긴장을 완화하고, 소통하며, 양자 간 신뢰를 유지하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3월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 전 셰인바움 대통령은 각료, 기업인 등 관계자와 상의하고 미국 대통령 발언을 철저히 연구한다"며 "트럼프의 모욕적 언사에 불쾌감을 표하는 대신 침착하게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10월 1일로 취임 1주년을 맞이했다. 유대계 출신 좌파 정치인인 셰인바움은 대학에서 물리학과 공학을 전공했으며 2018년부터 5년간 수도 멕시코시티 시장을 지냈다. 멕시코 경제신문 엘피난시에로의 9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셰인바움 긍정 평가는 73%에 달하고 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7일 진행된 브릭스 정상회의 관련 기사회견 도중,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이 마우루 비에이라 외교장관의 말을 듣고 있다. 2025. 07. 07 [AFP=연합]

 

"트럼프식 세계에선 이중 게임 여지 작다"
브라질 정부 '전략적 모호성'에 우려 표명

 

슈나이더는 2일 기고에서 브라질 룰라 정부의 '전략적 모호성'에는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룰라 정부는 브릭스 내에서 리더십을 유지하고 중국 관계를 심화하는 동시에 워싱턴과의 공개 충돌은 피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결과는 혼란스러운 신호였다. 베이징엔 유대를 재확인하고, 트럼프엔 대화를 약속하는 이런 이중 전략은 현실에선 의심을 낳았다"면서 "워싱턴은 가혹하게 대응했다. 핵심 산업 부문에 대한 징벌 관세, 주요 감시 목록에 브라질 포함, 그리고 브라질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규정하는 담론이 그것이다"라고 덧붙였다.

 

트럼프에 대한 멕시코와 브라질의 대응 차이에 그는 "멕시코가 먼저 워싱턴을 진정시키고 조약 재검토를 준비하는 순차적 기동을 했다면, 브라질은 명확한 순서나 우선순위 없이 수사적 저항과 전술적 양보를 결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투자자와 수출업자들은 (브라질의) 이러한 일관성 결여를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더 높은 비용, 불확실한 무역 조건, 워싱턴과 베이징 양쪽과의 협상에서 약화된 지렛대를 경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클라우디아 셰인바움(63) 멕시코 대통령이 독립기념일인 16일 멕시코시티에서 군사 퍼레이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5. 09. 16 [AFP=연합]

 

"멕시코, 단호함과 대립 같지 않음 보여줘,
이재명, 룰라와 셰인바움 특징 둘 다 갖춰

 

슈나이더는 "트럼프식 세계에는 이중 게임일 벌일 여지는 작다. 한 국가가 워싱턴에서 특혜를 기대하는 동시에 베이징에 충성한다는 신호할 수는 없으며, 그러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이미 드러나 있다: 약화된 수출 조건, 투자자들의 의심, 그리고 글로벌 협상에서 취약한 위치가 그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슈나이더는 "멕시코는 단호함과 대립이 같지 않음을 보여준다. 단호함은 경계를 설정하고, 속도를 조절하며, 실질적인 결과물을 가지고 협상하는 것을 뜻한다. 원칙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과정에서 양보할 의향이 있다는 의미다. 브라질은 정반대를 보여준다. 신호가 엇갈리면 비용은 증가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멕시코의 단호한 실용주의는 화려하진 않지만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슈나이더는 "이것은 단순한 외교 차원을 넘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며 멕시코 기업들엔 △ 90일 단위의 단기 계획을 세우고 △ 계약서에 관세 조정 조항을 포함하며 △ 내년 USMCA 재검토 협상에 대비해 증거 자료를 준비하라는, 그리고 정책 입안자들을 향해선 범죄인 인도, 합동작전 등 안보 협력도 대미 무역 협상의 포트폴리오 일부로 삼으라는 실질적 메시지를 준다고 풀이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홍보영상에 항공기 유도원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2025.10.2 [홍보영상 캡처] 연합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는 브라질의 룰라와 멕시코의 셰인바움, 누구에 더 가까울까? 소년 노동자 출신에 시민과 함께 내란 극복을 통해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측면에선 룰라와 가까운 반면, 대미 협상에서 '예의는 지키면서 협력하되, 국익을 위해 굴복하지 않는’ 실용적 자세에선 셰인바움에 가까워 보인다.                           < 이유 기자 >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 비관적 전망

아베 정권 ‘적통’ 다카이치 정권, 서로 다른 점
여대야소 아베 정권, 여소야대 다카이치 정권

야당과의 연립 또는 협조체제의 관건인 ‘감세’
이스라엘 네타냐후 극우정권과 닮은 구조?

대외정책에서도 닮은 구조, 한일관계 시험대에

 

일본 집권 자민당(LDP)의 신임 대표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가 10월 4일 도쿄에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 후 당 대표실을 나서고 있다.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는 이날 자민당 총재로서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것이라며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2025.10.4. 로이터 연합
 

저명한 일본정치 전문연구자 제럴드 커티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일본 집권 자민당이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사나에를 새 총재로 선출한 것을 두고 “그런 일은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다”며,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이코노미스트> 10월 4일)

 

‘그런 일’이란 글로벌 민주주의적 추세가 “양극화되고 민족주의적이며 문화전사적인culture-warrior) 정치” 쪽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극우세력이 대두하고 있는 유럽의 우경화와 최근 도널드 트럼프 재집권 이후 도드라지고 있는 미국의 극우 민족주의, 보호주의 현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힌다. 지난 7월의 일본 참의원선거에서 극우 참정당과 우익으로 기운 국민민주당이 크게 의석수를 늘리며 약진했을 때, 다수의 평론가들은 일본에서도 극우정당이 집권한 이탈리아나 극우정당 AfD(독일의 대안)이 제2당으로 도약한 독일과 같은 ‘유럽적 우경화’가 일본에서도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일본의 우경화는 동서냉전이 무너지고 일본 거품경제가 꺼지기 시작한 199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됐으며, 2006년의 극우 정치인 아베 신조의 1기 정권, 특히 2012년 말의 재집권(아베 2기 정권) 이후 일본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카이치의 총재선출 “자민당 붕괴를 재촉할 뿐”

 

커티스는 그러나 자민당이 다카이치를 총재로 선택한 것은 이미 위기에 직면해 있는 “자민당의 붕괴를 재촉할 뿐”이라고 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한 자민당 붕괴 재촉 요인은 먼저 다카이치가 당을 급격히 (더욱) 우경화시킴으로써 자민당의 보수(우익)세력과 중도세력 간의 균열을 확대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카이치의 등장은 좀 더 진보적인 야당세력이 자민당 내의 중도적 유권자들을 떼어내 갈 기회를 열어 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다카이치 총재는 지난 25년간 자민당의 온건한 연정 파트너였던 공명당과의 동맹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공명당은 이미 다카이치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무라야마 담화’를 부정하는 극우적 발언을 문제삼고 있고, 극우 참정당 등과의 연정이나 정책협력 가능성에 거부감을 보이며 연정 이탈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4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된 뒤 박수로 축하하는 동료 의원들에게 일어나서 화답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이코노미스트 10월 4일

 

논란이 된 다카이치의 배외주의적 차별 발언

 

다카이치의 최근 발언 중에서 정치적 논란거리가 된 것 중의 하나는 나라 공원에 야생상태로 방생돼 있는 사슴들을 “발로 걷어차는 어이없는 사람이 있다. 때려서 겁주는 사람이 있다”는 발언이었다. 외국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다카이치는 선거 과정에서 여러차례 이 말을 거론했는데, 요컨대 일본의 훌륭한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런 저급하고 위험한 ‘외국인’들을 규제하고 단속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가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관광객들에 대해 그런 배외주의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을 거듭한 것은 그것이 일본 유권자 대중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지목하진 않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주로 지금 일본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나 관광객 중 다수를 점하고 있는 중국인을 가리킨다. 예전에 재일 조선들이 일본 거주 외국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을 때 자민당 우익 정치인들이 입에 올리던 차별적이고 모멸적인 ‘삼국인’이란 말이 재일 조선인들을 가리킨 것과 유사하다.

 

다카이치가 그런 말을 거듭한 것이 참의원선거 결과 국회 1석밖에 되지 않았던 참정당이 15석으로 약진하고 국민민주당 역시 의석수를 대폭 늘린 것을 염두에 둔것이란 분석이 많다. 다카이치는 이시바 정권 때 치른 중참 양원 선거와 도쿄도 의회선거에서 자민당이 잇따라 참패해 창당 70년 역사에서 자민당이 양원에서 동시에 과반 미달 의석의 여소야대가 된 것은, 원래 자민당 지지세력이 확고한 보수우익의 ‘아베 노선’을 버리면서 골수 보수우익 지지자들이 자민당을 떠나 참정당 등 극우 신당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때로 정치적 논란까지 불렀던 그런 배외주의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을 거듭한 것은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간 그런 골수 지지자들을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양날의 칼인 배외주의 극우 발언

 

하지만 다카이치의 이런 배외주의적 발언은 자민당 이탈 지지세력을 다시 불러모으는 플러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 자민당 내 보수우익세력과 중도 내지 개혁 세력 간의 균열을 확대하는 마이너스 효과도 있을 수 있다. 다카이치의 최근 행보를 보면, 그는 마이너스 효과보다는 플러스 효과 쪽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아베 신조 1기 정권 때의 아베 신조 총리와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부특명담당대사. 당시 다카이치는 각료(대신=장관)로서 유일하게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아사히신문 10월 5일

 

아베 정권 ‘적통’인 다카이치 정권이 다른 점

 

오는 15일의 임시국회에서 총리로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이 예전 아베 신조 정권의 ‘적통’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아베 정권이 중참 양원 모두 압도적 과반수의 여대야소 정권이었던 것과는 반대로 다카이치 정권은 양원 모두 자민당 의원이 과만수 미달인 여소야대 정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다카이치가 15일 총리로 선출되고 이후 내각을 구성해 정권을 운영해 가기 위해서는 야당들과 연립정권을 구성하거나 정책들마다 야당과 협의해서 동의를 얻어내야 한다.

 

자민당 내 온건보수나 개혁세력 및 공명당 등의 반발 때문에 다카이치가 새 총리로 선출된 뒤 곧바로 ‘일본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참정당이나 일본보수당과 같은 극우정당들과 손을 잡고 연정을 구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는 라이벌격인 입헌민주당은 일단 제쳐놓고 국민민주당이나 일본유신회와 같은 기존 야당들과의 연립이나 협력체제를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

 

야당과의 연립 또는 협조체제의 관건은 ‘감세’

 

그럴 경우 대내적으로 가장 큰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것이 감세 및 재정조달 문제다. 지난 중참 양원선거 때 야당들은 거의 예외없이 감세를 한결같이 주장했다. 감세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창한 일본 정부부채를 더 부풀리게 될 것이다.

 

일본의 누적 재정적자(정부 부채)는 2020년에 GDP(국내총생산)의 258.40%, 2022년엔 261%로 세계최대, 최고 수준이었으며, 해마다 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로 대표되는 아베 정권 시절의 무제한 금융완화정책(아베노믹스)은 무제한의 돈 풀기(양적 완화)였고, 그것은 주로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의 국채(국가발행 채권=정부 부채)발행을 통해 이뤄졌다.

 

일본은 연간 국채 이자 부담액만 2023년 결산 기준 7조 엔(약 70조 원)대에서 2024년에는 10.9조 엔(약 109조 원)으로 늘었으며, 2025년에는 13조 엔(약 130조 원) 이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2025회계연도(2025년 4월~2026년 3월) 예산안 규모는 약 115조 5415억 엔(약 1150조 원)이다. 13조 엔이면 그것의 약 12%로, 해마다 일본 국가예산의 12%가 정부부채 이자로 나간다는 얘기고, 그것을 메우기 위해 그만큼 국채를 더 발행해야 한다는 얘기다.

 

최근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기조로 정부부채와 그 이자 부담은 가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한 해에 100만 명 이상씩 인구가 줄어가는 저출산 초고령 사회인 일본에서 과도한 정부부채 양산은 노령복지예산 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지속 불가능한 정책이다. 그래서 자민당은 감세가 유권자들 표를 얻게 해 줄 방책이라는 것을 알지만, 집권당으로서 차마 감세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야당들은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감세를 주장했다.

 

다카이치가 총리에 선출되고 내각을 구성해 정권을 운영하겠다면 그런 야당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극우정권과 닮은 구조?

 

이스라엘 우익 베냐민 네타냐후 정권이 국제여론, 때로는 트럼프 정권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 및 주변지역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대량학살) 공격을 계속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단독 집권이 불가능한 네타냐후의 리쿠드당이 극우 정당들과 연립정권을 구성해야 집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리직에서 물러날 경우 부패 혐의 등으로 기소돼 있는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네타냐후로서는 처벌을 피하기 어려운 처지여서 극우 정당들과의 연립을 통한 정권 유지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팔레스타인인들을 완전히 배제히고 유대인만의 통합국가를 세우겠다는 배타적 국수주의세력인 극우정당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다카이치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컨대, 연립 또는 협력 야당들의 감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강한 일본 부활을 외치는 다카이치는 아베노믹스류의 강력한 성장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지만, 감세를 주장하는 야당들과의 연립이나 협조체제는 돈 풀기식 재정적자 팽창을 제어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갈지도 모를 위험성이 있다.

 

‘잃어버린 30년’의 장기불황에 지친 일본 조야가 지금 모두 다카이치의 성장지향 경제구상을 지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장래를 낙관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혁 주일 한국대사(왼쪽)와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이 2일 일본 도쿄 뉴오타니호텔에서 주일본 한국대사관 주최로 열린 국경일(개천절) 및 국군의 날 기념 리셉션에서 함께 사진 촬영에 임하고 있다. 나카타니 방위상은 굳건한 한일관계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한자성어 '남산지수'(南山之壽)를 쓴 패널을 준비해왔다. 2025.10.2. 연합
 

대외정책에서도 닮은 구조, 한일관계 시험대에

 

대외적으로도 비슷한 구도가 펼쳐지지 않을까. 초지일관 야스쿠니 신사 참배론자인 다카이치는 지난해 총재선거에 출마했을 때도 총리가 되더라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겠다고 언명했다. 3번째로 도전한 이번 총재선거에서 총재가 된 뒤에는 기자회견에서 “적절한 시기에 적절히 판단하겠다”며 분명한 언급을 피했지만, 그런 자세로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과의 관계가 평탄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지난 참의원선거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듯이 참정당 등의 극우정당들은 아베 정권 시절의 수정주의 역사관 쪽으로의 회귀를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심지어 군국일본의 전쟁시기 침략주의 언동들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며 그것을 정당화했다.

 

다카이치 정권이 그런 극우정당들과 직접적인 연립을 구성하긴 어려울지라도, 전반적으로 극우경향을 보이는 우익 야당들의 역사관이나 대외정책들을 일정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될 공산이 크다. 이번 총재선거 결과를 보건대 자민당 자체도 우파 민족주의 성향의 발언들이 내부에서 더 힘을 얻고 있다.

 

집권 이후 일본의 대외정책은 적어도 이시바 정권이 추구했던 대외정책 방향과는 결을 달리하는 쪽으로 변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시바 정권과는 서로 해결 가능한 것들부터 접근해서 단계적으로 처리해 감으로써 마찰을 줄이겠다는 ‘구동존이’식 실용주의적 자세를 견지해 온 이재명 정부의 기존 대일정책이 유지될 수 있을까. 주도면밀한 대응자세가 요구된다.                                                                  < 한승동 기자 >

 

고이즈미 꺾은 ‘극우’ 다카이치…정권 잡아도 외교·경제 ‘초고난도 시험대’


“나도 ‘워라밸’ 버릴테니 말처럼 일해달라” 당부
좁은 확장성 한계…총리 취임해도 국정 어려울 듯

 

 
 
4일 일본 자민당 총재 선출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당선자(가운데 파란옷)가 일어나 인사하고 있다. 교도 연합
 

“일하고, 일하고, 또 일하겠습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을 이끌 다카이치 사나에 새 총재는 4일 당선을 확정한 뒤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든 세대가 전력을 기울여 힘쓰지 않으면 (당을) 재건할 수 없다”며 “제 스스로 ‘일과 삶의 균형’이라는 말을 버릴 테니 모두 마차를 끄는 말처럼 열심히 일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자민당 70년 역사에 첫 여성 총재가 됐다는 점을 인식한 듯 “새로운 시대를 새겼다”며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도 덧붙였다.

 

다카이치 새 총재가 향후 자민당을 이끌게 되면서 한·일 관계에 끼칠 영향에도 촉각이 쏠린다. 그는 당내 강경 보수파를 지지 기반으로 하며 우익 성향의 태도로 우려를 빚어왔다. 태평양 전쟁 에이(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 참배,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독도 명칭)의 날’에 기존 차관급 대산 장관급 인사 파견, 과거사 부정 등 발언으로 주변국을 자극해왔다. 자민당 총재 선거 결선에 오른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과 다카이치 새 총재 모두 현직 각료 신분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온 보수파이지만, 다카이치 새 총재의 우파 성향이 더욱 짙다.

 

다만, 한-일 관계 전문가인 오가타 요시히로 후쿠오카대 교수(정치학 박사)는 지난달 한겨레와의 자민당 총재 선거 관련 인터뷰에서 “일본 정치는 총리 한 사람만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며 자민당 내부 정치가 중요하다”며 “누가 총리가 되더라도 일본 정부 태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던 만큼 한-일 관계도 이번 선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차분히 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민당과 일본 정부는 오는 15일께 임시국회를 열어 차기 총리를 선출한다는 계획이다. 자민당이 소수 여당이지만 야당도 분열되어 있어 이번에도 자민당에서 총리를 배출할 가능성이 크다. 다카이치 새 총재는 총리에 오르면 빠르게 국제무대에 신고식을 치를 전망이다. 당장 이달말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해 미·일 정상회담이 예정됐다. 곧바로 한국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아펙) 정상회의에도 참석한다.

 

다카이치 새 총재는 이번 선거 시작 전부터 줄곧 고이즈미 농림수산상과 함께 ‘빅 2’로 꼽혀왔다. 하지만 정작 당선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적지 않았다. 실제 투·개표일을 앞두고는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에게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하면서 결선 진출조차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한 때 나오기도 했다. 애초 당내 강경 보수층에 지지기반이 집중돼 확장성을 보이지 못한 데다, 우익 성향이 짙어 집권당 수장으로는 야당과 협력이나 한·중·러 등 외교 관계에도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1차 투표에서 2위로 통과한 뒤, 약점으로 거론됐던 국회의원 지지표를 결선에서 대거 확보하며 당선과 자민당 내 지지세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다카이치 새 총재 앞에 놓인 길은 쉽지 않다. 실제 그는 이날 당선 뒤 “지금 기쁘다기보다는 지금부터가 진짜 큰일(이라는 생각)”이라며 “함께 힘을 합쳐 해결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수여당으로 정국 운영에 큰 어려움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현재 연립여당을 꾸린 공명당 외에 또 다른 야당과 연립들 확대가 논의되는데 여당으로서 입지를 더 좁힐 수밖에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날 “다카이치 새 총재가 총리에 오를 경우, 소수여당으로선 정권 운영을 안정시키기 위해 야당에 협력을 촉구한다는 방침”이라며 “당분간 물가 상승 대책에 우선 대응하고, 임시국회에서는 야당의 협력을 얻어 추가경정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도 중요한 목표”라고 풀이했다.

 

일본 안팎을 둘러싼 상황도 녹록지 않다. 국내적으로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1년 만에 끌어내린 주요 원인인 고물가 상황이 개선될 조짐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의 경제 정책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이날 다카이치 새 총재 당선 소식을 전하며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서 ‘아베노믹스를 지지해왔다”며 “가장 충격은 다카이치 새 총재가 펼치는 경제정책일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이시바 시게루 정부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와 상호관세 문제를 정리했지만, 향후 나라 곳간을 털어 5500억달러(774조원) 규모 대미 투자를 해야 하는 과제 등이 고스란히 남은 상황이다. 또 일본 정치권에서 ‘절대 강자’ 자리를 유지해오던 자민당의 추락도 막아야 한다. 자민당은 1990년대 초반 한때 당원 수가 500만명을 넘었지만, 현재 90만명대까지 떨어진 상황이다. 당 인기 하락과 함께 지지층이 줄어드는 결과로 선거 때마다 득표율이 낮아지면서, 집권당 자리를 위협받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 도쿄/홍석재 특파원 >

 

‘극우’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첫 여성 총재 당선…차기 총리 유력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이 4일 일본 자민당 당대표 선거 결선 진출 뒤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
 

사실상 차기 일본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상이 결선 투표 끝에 극적으로 승리했다. 극우 성향으로 꼽히는 그는 일본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아이사와 이치로 자민당 총재 선거관리위원장은 4일 치러진 당 총재 선거 결선투표에서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은 전체 유효 341표(당 소속 국회의원 294표, 당원·당우 47표) 가운데 절반을 넘는 185표(국회의원 149표, 당원·당우 36표)를 얻어 당선을 확정했다고 발표했다. 결선에서 경쟁한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156표(국회의원 145표, 당원당우 11표)에 그쳐 지난해 총재 선거에 이어 다시 쓴잔을 마셨다. 1955년 자민당 결성 이래 여성 총재는 처음이다. 국회 총리 선거에서 차기 총리로 확정되면 일본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에 오른다.

 

앞서 오후 1시께 시작된 1차 투표에서는 전체 590표(당 소속 국회의원 295표, 당원·당우 295표) 가운데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이 183표(국회의원표 64표, 당원·당우 119표)를 확보하며 당선 기대를 높였다. 선거 기간 주요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렸던 고이즈미 농림상은 국회의원들에게 가장 많은 80표를 얻었지만, 당원·당우 쪽에서 다카이치 전 경제안보상에 35표를 뒤지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뒤를 이어 하야시 관방장관 72표(국회의원 72표, 당원·당우 62표),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 59표(국회의원 44표, 당원·당우 15표), 모테기 도시미쓰 전 자민당 간사장이 49표(34표, 15표)로 뒤를 이었다.

 

자민당 총재 선거는 1차 투표는 소속 국회의원(현재 295명)에게 각 1표씩, 전국 91만여명 당원·당우 투표를 국회의원수와 같은 295표로 환산해 모두 590표를 득표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이다. 반면 결선 투표는 의원 295명이 새로 투표를 하되, 당원·당우표는 이미 투표된 것을 전국 47곳 광역지방자치단체(도도부현)별로 분류해 결선 투표자 가운데 다득표자가 해당 지역 표를 가져가는 방식(전체 47표)으로 진행된다.

 

1차 투표에서 과반 후보가 나오지 않아 치러진 결선에선 다카이치 당선자가 국회의원 쪽 지지를 추가하며 승리를 확정했다. 1차 선거에서 국회의원표가 64표에 불과했지만 결선에서 무려 149표를 얻었고, 당원·당우표(전체 47표) 36표를 더해 상대를 압도했다. 고이즈미 농림수산상은 애초 압도적 우위를 점한 것으로 알려진 국회의원 표에서도 일부 뒤진 데다, 당원·당우표에서 크게 뒤지면서 역전에 실패했다.                < 도쿄/홍석재 특파원 >

 

대통령실, 다카이치 총재 당선에 “일본 새 내각과도 긴밀히 소통·협력”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전보장담당상이 4일 일본 자민당 당대표 선거 결선 진출 뒤 연설하고 있다. 도쿄/AFP 연합
 

대통령실은 4일 일본 자민당 제29대 총재로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당선된 것과 관련해 “우리 정부는 일본의 새 내각과도 긴밀하게 소통하면서 한일 관계의 긍정적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이날 “10월 중순에 일본에서 새 내각이 출범할 것으로 보인다”며 “한일 양국은 격변하는 지정학적 환경과 무역 질서 속에서 유사한 입장을 가진 이웃이자 글로벌 협력 파트너인 만큼 앞으로도 미래 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어 “또한 한일 간 셔틀 외교가 완전히 복원된 만큼 새 내각이 출범하는 대로 신임 총리와도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극우 성향의 다카이치 전 담당상이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농림수산상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됐다. 다카이치 신임 총재는 일본 내에서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함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태평양전쟁 에이(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왔고, 독도 문제에서도 강경한 입장을 취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날 치러진 당 총재 선거 결선투표에서 다카이치는 전체 유효 341표(당 소속 국회의원 294표, 당원·당우 47표) 가운데 절반을 넘는 185표(국회의원 149표, 당원·당우 36표)를 얻어 당선을 확정했다.                                                < 이정국 기자 > 

미국에 내전이 임박했다는 영화의 예지력?

● WORLD 2025. 10. 5. 01:13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미국 극좌와 극우

 

                                                                                 오동진 영화평론가

 

혁명은 낡고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늙고 지치는 것이다. 그래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변질은 어쩌면 더 인간적이고 실존적이며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그런 행보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혁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 과격할 뿐인 혁명 이론은 반드시 조직과 이념 자체를 배신하게 된다. 가장 경계해야 할 부류는 좌파 모험주의자들이다. 그것이 우파 기회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인민의 적이라고 레닌은 말했다. 러시아를 혁명으로 이끌면서 레닌은 당내 투쟁 과정에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등 한때 우파 기회주의 행태를 보였던 인물들을 용서한다. 반면 과격한 스탈린만큼은 끝내 경계했다.

 

극좌 테러리스트보다 더 강고한 백인 우월주의자 조직

 

폴 토마스 앤더슨이 내놓은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사실상 미국 내에 여전히 극좌 테러리스트 조직이 존재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그 점이 놀라운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이제 한 줌도 안 되는 그 같은 정치 조직에 비해 그 반대편의 백인 우월주의자들, KKK의 후예들, 우생학적 인종주의자들이 더욱더 강고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 그들이 사실상 미국 정가와 군대를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더 놀라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주목해야 할 것은 ‘프렌치75’ 같은 반체제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국의 내란 음모 세력 같은, 비밀 백인 우월주의자 조직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 같은 조직이 강고하게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로 이번 영화를 본 후의 반응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어마어마’한 역작을 만들었다고 입에 침을 튀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이번 영화는 내면적으로 볼 때 일종의 리메이크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미 한번 만들어진 얘기이다. 2013년에 만들어진<컴퍼니 유 킵>이 그것이다. 얼마 전 타계한 로버트 레드포드가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샤이아 라보프가 상대역으로 나왔고 수잔 서랜든, 그리고 무엇보다 줄리 크리스티(맞다! ‘닥터 지바고’에서 라라 역을 맡은 줄리 크리스티이다)가 나왔다. 예전의 <컴퍼니 유 킵>이든 이번의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이든 같은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 다만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컴퍼니 유 킵>이 묘사하는 1970년대 정치적 사건을 2010년으로 옮겨 온 것일 뿐이다. 같은 사건이란, 미국의 극좌 그룹 ‘웨더 언더그라운드’에 대한 얘기이다. 1960~70년대 미국 내에는 좌파 진영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었으며 주류는 세 그룹이었다. ‘뉴레프트’와 ‘이피’, ‘블랙 팬서’가 그들이다. 그리고 비주류가 바로 이 ‘웨더 언더그라운드’이다.

 

 

좌파 진영 주류 세 그룹 아닌 한 비주류 그룹 이야기

 

이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 내 운동권의 세력 관계를 대략으로나마 아는 것이 중요하다. 1960~70년대 미국의 ‘뉴레프트’, 곧 신좌파는 ‘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를 말하는 것이다. 일종의 학생운동 조직이다. 훗날 유명 상류층 변호사로 변절한 톰 헤이든이 이끌었다. ‘이피’는 ‘Yippie’를 말하는 것이다. ‘국제청년당과 히피연합(Youth International Party and Hippie)’을 말하는 것으로 펑크족과 선동가들로 구성된 정치집단이었다. 히피와 신좌파의 중간노선을 취했으며 아나키스트였던 애비 호프먼이 이끌었다. 호프먼은 레이건의 등장과 미국의 우경화를 비관해 자살했다. 그리고 그 유명했던 흑인 무장투쟁 조직인 흑표범당, 곧 ‘블랙 팬서’당이 있다. 이 ‘블랙 팬서’가 현대에 이르러 미국 대부호 영화사 월트 디즈니에 의해 <블랙 팬서>라는 히어로물 시리즈로 만들어진 것은 아이러니 중 최고의 아이러니이다.

 

이들 세 그룹에 비해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그다지 많이 알려진 그룹이 아니다. ‘SDS’와 ‘이피’가 대체로 백인 중심이었고 ‘블랙 팬서’가 흑인 중심 좌파 그룹이었다면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흑백 조합의 그룹이었다. 아이리스라는 이름의 흑인 지도자가 이끌었다. 이 아이리스는 버락 오바마가 자신의 정신적 멘토로 삼았음이 알려지면서 한동안 소환됐으며, 오바마가 극좌 흑인 테러리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격의 소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웨더 언더그라운드’는 베트남전 반대 등을 기치로 내걸고 펜타곤 폭탄 테러 등을 ‘감행’했고 조직의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미시간주의 한 은행을 털다가 경비원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대중의 공분을 샀다. 그 과정은 이번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더 나은 사회 떠들면서 은행강도 벌이는 극좌 조직 리더

 

영화 속 정치 조직 ‘프렌치75’의 리더인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테야나 테일러)는 점점 더 이념적으로 극단화된다. 그녀는 이데올로기 못지않게 육체적 욕망, 현시욕 또한 점점 더 심해진다. 퍼피디아가 백인 우월주의자이면서 유색인종에 대한 패티시즘이 강한 스티븐 록조(숀 펜)와 외도 행각을 벌이다 결국 조직까지 배신하는 이유이다. 퍼피디아의 행동 동기는 더 나은 사회 체제를 만드는 것인 양 떠들어 대지만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 나가는 것에 불과했던 셈이다. 퍼피디아가 밥 퍼거슨(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어린 딸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겠다며 집을 나서지만 결국 저지른 것은 은행강도 짓이다.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웨더 언더그라운드’ 그룹의 미시간 은행털이 사건을 2010년대로 가져오고, 조직의 리더를 흑인 여자로 바꾸는 등(지도자가 여성이었던 그룹은 ‘블랙 팬서’였다. ‘블랙 팬서’의 지도자는 영화 속 퍼피디아처럼 쿠바로 도주했다) 역사적 사실 몇 가지를 극화시키는 과정에서 합치거나 해체시켰다. 퍼피디아의 캐릭터 자체가 ‘웨더 언더그라운드’의 아이리스와 ‘블랙 팬서’의 조앤 데버라 바이런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일종의 팩션인 이유이다. 이 영화는 토마스 핀천이 쓴 『바이랜드』를 원작으로 했다. 『바이랜드』가 팩션 소설이었던 셈이다.

 

 

출세 위해 좌파 추적하고 자신의 흔적마저 지우려는 극우주의자

 

주인공 밥 퍼거슨이 퍼피디아의 은행 살인강도 이후, 원래 이름을 펫에서 밥으로 바꾼 후 박탄 크로스(엘파소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가상 공간. 이민자들의 천국으로 묘사된다)로 피신해 딸인 샬린을 윌라(체이스 인피니티)로 개명시키면서까지 16년간 은둔하며 키워 낸 것은 <컴퍼니 유 킵>의 주인공 닉 슬론(로버트 레드포드)이 짐 그랜트라는 이름으로 30년간 은둔하면서 어린 딸(영화 속에서 그는 뒤늦게 결혼한 것으로 나온다)을 키우는 설정과 비슷하다. 두 영화 모두 애지중지하는 딸이 위기에 처한다. 부성이 작동한다. 부성은 이념을 앞지르고 역사를 가로지른다. 사람들의 가슴을 훔친다.

 

같은 맥락이어도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 얘기를 블랙 코미디로 풀었다. 바로 그 점이 이 역사의 얘기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서 대중들 정서에 한층 깊이 침투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6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가 ‘프렌치75’를 중심으로 하는 펫(나중에 밥이 되는 디카프리오. 조직에서 그는 폭파 전문가이다)과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의 삶, 여기에 록조(그는 이민자 수용소 소장에 불과했다)와의 만남에 치중한다면 2부는 16년 후 대령이 된 록조가 밥과 그의 딸 윌라를 쫓고, 특히 윌라를 제거하기 위해 박탄 크로스에 군대를 이끌고 치러 들어온다는 이야기로 돼 있다. 밥과 윌라를 제거하려는 록조의 행동 동기는, 자신이 순혈 백인 극우 집단인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미국의 극우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조직명을 동호회처럼 짓는다)의 일원이 되려 할 때, 자신과 퍼피디아와의 사이에서 혼혈인 윌라가 태어났을 수 있다는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의혹을 사전에 깨끗이 차단하려 한다.

 

늙고 병든 좌파와 기세등등 극우가 만드는 위태로운 코미디

 

2부의 추적 장면은 시종일관 슬랩스틱의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밥 퍼거슨은 이제 늙었다. 혁명은 결코 낡거나 쇠퇴하지는 않을지언정 늙고 병들었거나 이제는 ‘추억팔이’ 정도에 불과한 것일 수 있게 된다. 밥은 컨테이너 같은 집에서 살아가며 윌라가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KKK단 지도자의 초상이 걸려 있는 학교에 다니는 걸 못내 못마땅해 하고 집에서 대마초를 피워 대며 그 유명한 혁명 영화 <알제리 전투>를 보는 것으로 소일하는 정도이다. <알제리 전투>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투쟁기를 그린 영화로 이탈리아 질로 폰테코르보가 1966년에 만든 영화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이 보기에 늙고 쓸모없어진(밥은 이제 옛 조직으로부터 온 통화에서도 암구호를 외우지 못해 온갖 말싸움을 벌인다), 그리하여 이제는 미국 사회의 변방 중 변방으로 밀려난 극단의 정치 조직을 여전히 대단한 세력인 양 과장, 왜곡하는 미국 내 극우 집단들의 행태야말로 나라를 매우 위태롭게 만드는, 진정 코미디 같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 코미디가 바로 지금 트럼프 제2기 시대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며 아마도 자신이 묘사한 스티븐 록조의 일그러진 표정(록조는 나중에 진짜 얼굴이 구겨질 만큼의 큰 총상을 입는다)처럼 트럼프 시대가 망가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록조처럼 ‘한물 간’ 좌파들 들춰내 죽이고 탄압하려는 트럼프

 

영화는 일정한 예지력을 갖는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번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알렉스 가랜드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와 함께 미국에 내전 상황이 임박했음을 보여 준다. 마침 트럼프가 전 세계 모든 미군 장성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정신 훈육을 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트럼프도 록조처럼 이미 ‘한물 간’ 좌파들을 들춰낼 것이다. 그리고 국가를 구한다는(MAGA 프로젝트 같은) 잘못된 사명감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탄압할 것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 영화는 바로 그 얘기이다. 우리가 먼저 겪은 이야기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이다. 영화는 늘 진짜 벌어진 일, 벌어지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이야기한다. 영화를 보면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