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염원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지 8일 째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부터 설레임보다 걱정이 더 앞섰다. 한달 이상의 기간 동안 무려 800km가 넘는 길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난히 소화 할 수 있을지, 숙식은 매일 어떻게 해결하며 하루의 일정은 어떤 식으로 조정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물론 순례길에 대한 책도 몇 권 읽고 여러 사이트를 통해 정보 수집도 많이 했지만 그저 이론에 불과 할 뿐 실전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드디어 첫 날, 순례길 사무실에서 전 구간을 세분화하여 짜여진 일정표와 각 지역에 산재한 숙소리스트를 받아들었다. 그리곤 자원 봉사자와 함께 순례자 여권에 첫 스탬프를 찍으면서 우리의 긴 여정은 시작되었다. 조가비 문양따라, 노란 화살표 따라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그 길에 첫 발을 내딛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버스에서 함께 내렸던 십여 명의 초보 순례자들은 어디로 흩어져 갔는지 바람부는 언덕길을 우리 부부만 호젓하게 올랐다.

침대 윗칸에서 들썩거리는 소리에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 조금 넘었다. 잠을 좀 더 청하려는데 여기저기서 바스락거리는 소리하며 일부는 배낭을 메고 살그머니 문을 나선다. 깜깜한 신 새벽에 길을 나서는 사람들, 참으로 대단한 열성이다. 나도 잠자기를 포기하고 단숨에 일어나 어둠 속에서 살금살금 짐을 꾸린다. 한 일주일 간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환경에 적응하는 눈이 열린 듯하다.
다국적 사람들이 모인 주방에서 시리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준비해 둔 점심을 챙겨 대문을 나선다. 새벽 공기가 제법 쌀쌀하여 옷깃을 여미는 사이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 하며 몇 사람이 우리를 스쳐 간다. 채비를 마친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길을 잡는다. ‘시작이 반’ 이라는 옛말이 어쩜 이리도 명쾌한지 일단 시작하고 나니 그 많던 걱정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오로지 걷는 일에만 전념한다.
 
마을 길을 꼬불꼬불 돌아 산길로 접어들자 가까운 능선위로 검붉은 해가 막 떠오른다. 오늘 하루도 저 태양처럼 뜨겁게 살기를 다짐하며 한 컷 담는다. 우리의 뒤를 따르던 필립 씨도 월출 광경에 연신 셔터를 누르며 흥얼거린다. 그와는 며칠 전 비 내리는 피레네 산맥 줄기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중 산행을 함께 한 처지라 그의 환호에 충분히 공감한다. 길 위에선 조그만 인연이 긴 호흡으로 이어져 동행이 되고 때론 동지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 한다.
일회용 밴드로 물집 잡힌 양 발을 도배하고 나선 이 아침도 마음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상큼하게 걷는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야 하는지 같은 고답적인 물음은 시간이 해결 해 주리라 믿고 소풍 길 가듯 밀밭과 포도밭 사이를 걸으며 동행들과 담소도 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오늘은 로스 아르코스를 향하여 30킬로미터 남짓 걸었다. 얕으막한 산을 몇 구비 넘고 하산 길도 꽤나 어려웠는데 무난히 잘 마쳐 뿌듯하다. 갈 길이 멀어 가능하면 무리하지 않으려하나 조용한 숙소를 찾다보니 발을 꽤나 고생시켰다. 다행히 산중턱 조그만 성당에 숙소를 잡았고 저녁 식사는 십여 명의 순례객과 성당 관계자들이 함께 만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그리곤 다락방으로 올라가 각자의 방식대로 기도를 드리고 앞서간 순례자들이 남긴 편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낭독했다.
‘날이 거듭될수록 다리는 튼튼해지고 가슴은 더 뜨거워 질 것’ 이라는 멘토가 진실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내일을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듯하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칼럼]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의 폭력

● 칼럼 2018. 5. 23. 13:10 Posted by SisaHan

요즘 아이들은 꿈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똑같은 질문을 자꾸 받으면 정답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진짜 꿈을 이야기하다가(‘마법학교에 다니고 싶다’) 점점 어른들의 기대에 맞추어 대답을 바꾼다(‘해리 포터를 뛰어넘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아이들의 꿈의 세계를 이렇게 식민화하는 일이 진로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한술 더 떠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려면 초등학생에게 창업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진로를 일찍 결정하는 것이 과연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까? 4차 산업혁명이 예고하는 변화의 핵심은 직업구조의 전면적인 재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직업의 40%가 사라질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그 말은 특정한 직업을 준비하는 데 청소년기 전체를 바치는 것은 위험한 전략이라는 뜻이다.


만일 어떤 학생이 통역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등학교 내내 준비했는데, 졸업할 무렵 이 직업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장래 희망을 3년 내내 통역사로 적어 냈고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도 모두 거기 맞춰서 했다. 그가 뒤늦게 진로를 수정한다 해도, 이런 학생부를 가지고 ‘학종’으로 원하는 과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은 평생 5~6개의 직업을 갖게 되리라고 한다. 현재의 진로교육은 그중에서 첫번째 직업에만 초점을 맞출 뿐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여러 나라는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우리와 크게 다르다. OECD 국가들의 일반적인 전략은 기초교육, 특히 수학, 과학 교육을 강화하고 성인의 재교육을 쉽게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수학 시간이 전반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트래킹이 약화되고 있다. 트래킹(tracking)이란 실업계와 인문계, 영재 코스와 일반 코스 등으로 트랙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래킹은 학업성취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독일은 2000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OECD 국가 중 꼴찌에 가까운 성적을 냈는데, 인문계와 실업계의 구별이 너무 일찍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폴란드는 15세에 이루어지는 트래킹을 16세로 늦추는 것만으로도 PISA 점수가 크게 올랐다. 핀란드는 영재코스를 따로 만들지 않고 앞서가는 아이가 뒤처지는 아이를 도와주게 하는데, 덕택에 핀란드 아이들은 다들 수학을 잘한다.
한국은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로, 수학 시간을 줄이고(현재 OECD 국가 중 한국이 제일 수학 시간이 적다) 트래킹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수능에서 기하를 뺀 것이 그 예다. 다른 나라의 고등학생들은 기하를 배우는데 우리나라 고등학생들만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대한 교육부의 대답은 이렇다. “수학은 똑똑한 애들만 하면 된다.” 사실 수능은 ‘영재 트랙’에 들어가지 못한 평범한 학생들을 위한 제도로 바뀐 지 오래다. 수능을 치지 않는 영재고 학생들은 이러나저러나 기하를 공부할 것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1%의 영재가 99%를 먹여살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나는 부디 그들이 이 말을 한 사람이 이건희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수학 공부를 1%의 영재에게 맡기는 한 진보적인 정치인들은 기술관료주의에 종속될 수밖에 없으며, 최종 심급에서 ‘삼성의 지배’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핀란드가 어떻게 노키아 없이 살아남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김현경 - 문화인류학자 >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의 차녀 조현민씨의 ‘물컵 투척’ 사건이 세간에 불거진 지난달 13일 이후 한달 동안 쏟아진 회장 일가의 비리 행태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업무방해, 폭행, 밀수, 수백억원대 상속세 탈루에 필리핀인 가사도우미를 불법 채용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
검찰과 경찰, 관세청, 국세청에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까지 조사에 나선 배경이다. 회사 직원들까지 총수 일가 퇴진 운동에 나섬에 따라 조 회장은 리더십을 상실한 지경에 빠졌다. 조 회장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야 할 시점이다.


정부 당국의 전방위적인 조사 못지않게 조 회장 일가 쪽이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은 내부 직원들의 공공연한 반발이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지난 4일 1차에 이어 12일 저녁 2차 촛불집회를 열었다. 주말이고 궂은 날씨였음에도 300명 넘게 모여 총수 일가 퇴진을 촉구했다. 대한항공은 물론, 진에어와 한국공항, 인하대 등 한진그룹 여타 계열사 직원들도 가세해 외연은 더 넓어졌다.
외부 시민들의 호응이 커짐에 따라 직원들은 3·4차 집회를 예고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업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기왕의 행적만큼이나 경악스러운 것은 불거진 사태에 대한 조 회장 일가의 느슨한 인식과 태도이다. 조 회장은 지난 10일 한진 계열 중 가장 작은 덩치의 진에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그나마도 사내이사직은 계속 유지하기로 해 ‘꼼수 사퇴’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조 회장의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한진그룹을 통해 내놓은 ‘대리 사과’도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영상으로 확인된 일부 폭행 사실만 인정했을 뿐 대부분 혐의를 부인했다.


대한항공은 직원들의 땀과 정부 지원, 국민 성원 덕분에 세계적인 항공사로 성장했다. 조 회장 일가는 여러 이해당사자들 중 한 축(주주)의 일부일 뿐이다.
대한항공의 기업가치가 더 추락하기 전에 조 회장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일가가 모두 물러나고 독립된 전문경영인에게 경영 쇄신을 맡겨야 한다. 꼼수 사퇴로 당장의 난관을 피해 가려는 얄팍한 주판알 튀기기 식 태도 또한 버리는 게 더 큰 곤경에 빠지지 않는 길이다. 2선으로 잠시 후퇴해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잠잠해진 여론을 틈타 다시 복귀하는 일은 선대 조중훈 회장 시절의 구태로 그쳐야 한다.


계약서의 중요성 - 2

협상 해결 드물고 소송 중재는 비용 막대‥ 철저 계약 최선

지난 컬럼에서는 계약서의 의미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전에 계약서를 치밀하게 작성하여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고, 피치 못할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는 최대한 방어할 수 있는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당부를 드렸습니다. 이제, 이번 칼럼에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대로 ‘계약 불이행 또는 조항해석의 이견에 대한 해결방법’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일 예로, 한 회사가 특정 모양으로 된 젤리(Jelly)를 생산하도록 외주를 주었는데, 제품을 납품 받은 후에 몇 일이 지나면 그 모양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주 회사에 수차례에 걸쳐 시정을 요구했지만 같은 현상이 반복되자 결국 법적인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발주회사는 제품의 모양이 변형되는 것이 계약 불이행 또는 위반이라고 주장했고, 외주회사는 처음부터 발주회사로부터 제공받은 제조방법(Recipe)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법적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 취할 수 있는 해결방법으로, 가장 먼저 협상 (negotiation)이 있습니다. 말그대로 양당사자가 대화를 통해 원만한 피해보상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협상은 이해 당사자가 직접 하는 경우도 있고, 변호사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법적인 분쟁에서 자기의 잘못을 어느 정도 인정하며 원만한 선에서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협상을 통해 분쟁이 해결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소송을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즉 상대방의 의중과 전략을 미리 파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협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에서 예로 든 분쟁의 경우에도 결국 협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소송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두번째 해결방법은 소송(litigation)입니다. 소송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가 상대방을 대상으로 법원에 구속력 있는 해결을 요청하는 것 입니다. 소송의 잇점은 자료 제출 (document production) 및 증인 신문 (examination for discovery) 등의 절차를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불리한 증거를 소유하고 있는 상대방을 압박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소송의 경우 법원의 일정과 상대방의 지연 전략 등으로 인해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소송과 비슷하나 전혀 다른 세 번째 방법은 중재(arbitration)입니다. 중재는 계약서상에 양당사자가 이미 모든 분쟁을 중재로 합의할 것임을 명시한 경우에 가능합니다. 소송과 달리 중재는 시작부터 양당사자가 합의를 통해 진행 절차 (timetable)를 정하기 때문에 중재의 시작과 끝이 꽤 명확하고 지연 전략을 사용할 가능성이 매우 낮습니다. 따라서, 소송과 달리 신속하게 진행됩니다. 다만, 중재인 (arbitrator)이 판사가 아니고 해당 분야의 정통한 변호사이기 때문에 판사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편견없는 공평성은 다소 부족 할 수 있고, 중재판결에 불복하여 법원에 항소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에 소송을 두번하는 것과 같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계약 불이행 또는 해석의 이견으로 인해 발생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는 이상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절차들을 통해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통상 손해배상, 가처분, 또는 계약 이행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협상을 제외하고, 소송이나 중재의 경우에는 그에 따른 막대한 비용과 함께 시간도 길게는 수년이 소요될 수 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물론 일상 생활에도 적지 않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아무리 이전에 좋은 관계였었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를 쉽게 깨뜨릴 수 있는 것이 법적인 분쟁입니다. 그래서 소송을 진행하기 전에 대부분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제로 분쟁이 협상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당부를 드린바와 같이, 처음부터 계약서를 작성할 때 차후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잘 검토하며 작성하시어 법적인 분쟁의 발생과 그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영신 변호사 - Marrianne Y. Pak 법률 사무소 >
문의: 647-216-3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