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아름다운 것은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은 최소한의 예절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축구에서 오프사이드는 공격자들이 공격해 들어갈 때 골키퍼를 제외한 최종 수비수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미리 앞으로 나가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인데, 매우 예절 바른 인간주의적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전쟁에서 이 오프사이드 규칙이 적용된다고 생각해보면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규칙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부여된다는 게 스포츠의 첫 번째 절대적 룰이다.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가령 400m 달리기에 출전한 남아공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선수의 경우, 두 다리 모두 보철의족을 달고 400m에 출전했으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그에게 특전을 주진 않는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선 외팔인 헝가리의 카로이 터카치 선수가 속사권총에서 금메달을 받았는데 그때 역시 특별대우는 전무했다. 예외를 허용하면 전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두 번째 절대적 룰은 시간이다. 점수로 승부를 제한하지 않는 어느 종목, 어느 선수에게든지 똑같이 일정한 시간이 제공된다. “시간은 만물을 만든다”는 베다경전의 경구처럼, 시간은 “스포츠를 만든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스포츠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스포츠에서 시간은 최소한의 모럴(moral)이자 최대한의 전략이다. 시간 제한이 없다면 전술과 작전도 사실상 필요 없으며, 스포츠가 스포츠로서 설 자리를 온전히 잃게 될 수밖에 없다.
펜싱 에페 4강전에서 1초의 오심으로 분패한 신아람 선수의 경우가 그렇다. 국제펜싱연맹이 “미안하다”며 공식적으로 오심을 인정했는데도 끝내 판정을 번복하지 않은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나, 보도된 게 맞다면, 울고 있는 신아람에게 다가와 “나는 1초에도 너를 세 번은 찌를 수 있다”고 말한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이나, 스포츠의 모럴을 팽개쳤다는 점에서 보면 그 심판에 그 선수다 싶다. 쿠베르탱 남작의 순수했던 올림픽 정신이 이미 세계 자본의 폭력적 논리에 대부분 유린당한 시대니, 이런 건 어쩌면 소소한 시빗거리에 불과할는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가 심판의 오심에 기대어 이겼다면, 불건강한 1초 때문에 승자가 된 독일 선수 입장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국제펜싱연맹은 물론 독일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의 인터넷 누리집까지 우리 네티즌들의 항의성 공격으로 마비됐다는 말이 들린다. 심지어 그녀의 남자친구 홈피까지 그런 상태라고 한다. 애국적인 분노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와 독일의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보면 고개가 갸웃해진다. 대선 국면이라 연일 대통령 잠재적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생중계받는 때여서 더욱 그렇다. 우리가 지금의 대통령을 뽑을 때, 그분의 도덕성에 대해 깊이 신뢰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우리는 ‘어떤 결과’를 예감하면서, 그분 개인이 ‘성공신화’를 써왔으므로, 모럴이나 규칙 따위는 슬쩍 탁자 밑으로 내려놓고 오로지 나만의 성공신화를 욕망하며 그분에게 호루라기를 불어줬던 건 아니었을까.
바르바라 차르 심판이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 어쩌다가 실수로 그랬는지는 확언할 수 없다. 어쨌든 오심을 알면서도 끝내 자기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심판과 울고 있는 신아람 선수에게 다가와 자신은 “1초에 세 번”도 찌를 수 있으니 승복하라는 독일 선수의 뻔뻔한 모습에서 나는 요즘의 우리 정치판을 본다. 어찌 정치판뿐이랴. 룰을 지키지 않아도 일단 이기고 보면 지키지 않은 룰에 대해 얼마든 명분을 만들어 미사여구로 덮고 갈 수 있다는 ‘승자중심주의’ 생각이 보편적 관행이 되어버린 것이 우리 사회니 하는 말이다.
우수한 심판은 모럴에 대한 견고한 자기확신과 더불어 눈이 밝아야 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오로지 내게 유리한 선수의 손을 들어주고 막상 덕본 게 없으면 하루아침에 딴소리를 하는 것은 죄에 가깝다.
5년 만에 돌아오는 이번 ‘경기’에서 우리는 “1초의 오심”도 허용해선 안 된다. 나의 심판에 의해 바로 나 스스로가 먼저 억울한 ‘신아람’이 되는 건 최소한 막아야 한다.
< 박범신 작가·상명대 석좌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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