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1997 대선의 교훈

● 칼럼 2012. 9. 17. 09:37 Posted by SisaHan
1997년 대선 네거티브의 정점은 이른바 DJ 비자금 사건이었다. 대선을 두 달여 앞두고 신한국당 이회창 쪽은 김대중의 수백억원 차명계좌 보유설을 제기했다. 
DJ는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을 은밀히 만났다.(대선 직전 제1야당 후보와 청와대 비서실장의 극비 회동은 졸고 <김대중 집권 비사>에서 취재원과의 약속에 따라 모두 익명 처리됐다.) 
“검찰이 나를 수사하면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나요. 80년 전두환 때는 군부가 나서서 막았지만 이번엔 군도 나서지 못할 거요.” 디제이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하라며 협박조로 했던 말이다. 
역대 대선마다 상대 후보의 약점을 캐는 네거티브가 극성을 부리지만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다. 박근혜 입장에선 안철수를 거꾸러뜨리면 대선은 절반 이상 이긴 거나 마찬가지다. 
풋내기 정치인 정준길이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다 급기야 안철수를 주저앉힐 요량으로 친구 변호사한테 협박인지 종용인지를 한 것도 이런 유혹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교적 오랜 세월 검증을 받아온 박근혜와 달리 안철수는 검증 포인트가 무궁무진하다. 사업을 했던 사람이라 약점도 많을 법하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후보가 검증 공세에 곤욕을 치른 데서 보듯, 신인일수록 검증에 취약하다. 피할 수 없다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 
네거티브 공세에는 변명만 하고 있다간 어느새 빈털터리가 되기 십상이다. 금태섭 변호사가 정보기관 개입설 등으로 맞짱을 뜬 걸 두고 안철수가 기존의 정치를 답습했다고 하지만 안철수는 기존 정치를 더 배울 필요가 있다. 
대선 막판 검증이나 네거티브가 검찰 손아귀로 넘어가면서 선거 향방의 결정적 변수가 되는 것은 한국 정치의 독특한 다이내믹이다. 우리 정치의 부끄러운 단면이기도 하다. 92년 대선 땐 검찰이 제3후보인 정주영을 때려잡으면서 YS가 낙승했고, 97년 대선 때는 YS가 검찰의 DJ 비자금 수사를 막으면서 DJ가 승기를 이어갔다. 2007년엔 검찰이 확실히 이명박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대선은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이 검찰과 경찰, 국정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을 장악한 가운데 치러진다는 점에서 97년 대선과 그 지형이 흡사하다. 
97년 10월 DJ가 김광일을 만난 지 얼마 안 돼 검찰은 이회창에게 굴욕을 안긴다. 그의 국회 대표연설 와중에 비자금 수사 중단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YS의 마음이 이회창에서 이인제로 넘어간 탓이기도 했지만, DJ는 협박이든 회유든 모든 걸 동원해 검찰을 중립화함으로써 대선 승리의 기반을 닦았다. 
얼마 전 한 종편에 출연한 인사가 산업은행 뇌물사건과 관련해 안철수의 공소시효가 완료됐는지 애매하다며 시민단체의 고발을 은근히 부추기는 걸 봤다.
 
안철수가 야권에서 대선행 티켓을 거머쥘 경우 안철수를 거꾸러뜨리고 싶은 사람들은 검찰을 어떻게든 끌어들여 산업은행 뇌물사건을 재수사하게 하고 싶을 것이다. 문재인·손학규·김두관 등 다른 야권 후보가 나와도 마찬가지다. 이 정부에서의 검찰 행태로 보면 검찰이 대선판에 끼어들어 분탕질을 할 여지는 다분하다. 
15년 전의 일이라 새삼스럽긴 하지만 97년 대선의 교훈은 이렇다. 야당 후보는 어떻게든 대선 국면에서 권력기관과 일대 전투를 벌여야 한다. 
야당 후보에 대한 네거티브는 대체로 여당에 장악된 권력기관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DJ 비자금 사건 당시 자료의 출처는 청와대였다. 야당 후보는 네거티브를 확대재생산하고 자신을 옭아매 사지에 몰아넣을지도 모를 권력기관을 어떻게든 무력화·중립화하지 않으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 한겨레신문 백기철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