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과거가 쏟아내는 질문들

● 칼럼 2012. 9. 17. 17:53 Posted by SisaHan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말고, 보라’고 했다.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규칙을 알려면 생각하기 전에 일단 보라는 뜻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요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을 일단 보자.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하루에도 몇 건씩 보도된다.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왕따와 학교폭력, 입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청소년의 자살 소식도 매일 들린다. 박근혜 후보가 전태일 열사의 유가족을 방문하여 악수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쌍용차 노조원을 만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박근혜 후보는 “민생 현장을 많이 다니면 그런 분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월 박근혜 후보와의 만남을 청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에스제이엠(SJM) 노동자의 파업 현장에 투입된 경비업체 컨택터스의 무차별적 폭력을 경찰은 코앞에서 보고도 방관했으며 신고 역시 무시했다. 약 22조원을 들여 파헤친 4대강에서 심각한 녹조현상이 일어났다. 4대강 사업에 참여한 건설사의 비리와 짬짜미가 밝혀졌다. 이명박 취임 이전부터 제기되었던 내곡동 투기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면,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어떤 규범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인지. 그리고 또 생각해보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어떤 곳인지. 유신정권 시절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죽음과 폭력과 기만과 약육강식으로 뒤덮인 지금과 같은 세상이었을까? 
유신이 경제발전을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는 홍사덕 전 의원의 발언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앞으로도 그러한 독재를 다시 반복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경제를 살리겠다고만 하면 범법자를 대통령 자리에 앉힐 만큼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가장 먼저 원한다.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힘을 가진 자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고 힘없는 자의 생존권은 짓밟아버리는 정책도 수긍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죽여 없애거나,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그만이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공부 열심히 하고 돈 많이 벌어서 출세해야 한다고 자식들을 가르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일까. 범죄율과 자살률이 낮은, 더불어 행복한 세상.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더라도 행복지수가 높은 세상을 함께 꿈꿀 순 없을까.
 
지나간 것은 미화하기 쉽다. 하지만 현재를 제대로 살려면 과거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진실을 밝히고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진실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의로운 일이다. 전태일의 분신과 쌍용차 해고자의 죽음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일본 총리의 발언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난무하는 죽음과 폭력과 기만 사이로, 과거가 우리에게 던지는 집요한 질문이 들리지 않는가. 
일단 보았다면, 괴롭더라도 생각해야만 한다. 대충 처박아둔 과거와 외면하고 싶은 현재의 문제에 대해. 그래야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과거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일단 멈추라고. 생각하라고. 부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 최진영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