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대중의 망각을 먹고 자라는 것일까?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총재가 24일 악수를 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씁쓸하다.
노병이 돌아왔다.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했지만, 한국 정치의 노병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게다가 귀환한 노병은 적잖이 흡족한 표정이다. 이 전 총재는 “박 후보가 저희 집으로 찾아와 매우 정중하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유비의 ‘삼고초려’에 마음을 연 제갈공명에 자신을 비견하는 듯한 태도다.
하지만 이 전 총재가 누군가. 그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 부패인 불법 정치자금의 상징이다.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의 16대 대선 후보로 나선 2002년에 그의 측근들은 재벌들로부터 823억원의 대선자금을 받았다. 현금이 실린 차를 통째로 넘겨받아 ‘차떼기’라는 전무후무한 별칭까지 얻었다. 아랫사람 10여명이 처벌받고 자신은 불입건됐지만, 차떼기의 정점에 그가 있음은 불문가지다. 823억원은 당시 대선 후보의 법정 선거비용 한도인 226억320만원의 3.6배나 됐다.
앞서 1997년 15대 대선에서도 이 전 총재의 주변 인사들은 대기업들에서 166억3000만원을 불법모금했다가 적발됐다. 이 사건은 당시 임채주 청장과 이석희 차장 등 국세청 고위간부들이 개입한 탓에 ‘세풍 사건’으로 불렸다. 국가기관까지 불법 대선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동원했으니 국기를 뒤흔든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박 후보는 그런 이 전 총재를 삼고초려해 손을 잡았고, 그 순간 박 후보가 주장해온 정치쇄신은 빛이 바랬다. 정치쇄신은 경제민주화와 함께 박 후보가 일찍부터 내세운 대표상품이었다. 하지만 박 후보는 재벌개혁 포기와 함께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팽’하면서 한쪽 날개를 꺾었고, 이번엔 이 전 총재를 끌어들이며 정치쇄신의 날개마저 접었다.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 사건에 연루돼 3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한광옥 전 민주당 상임고문을 영입하자 “쇄신 이미지가 깨졌다”며 반발했던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도 이 전 총재에 대해선 별말이 없다. 안 위원장은 대검 중앙수사부장 시절 차떼기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당사자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박 후보만 나무라긴 어려운 일이다. 선거철에 표가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지도자가 되려는 정치인이 말과 행동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지 못하는 경우는 대중이 제대로 감시하고 기억할 때뿐이다. 정치인의 혹세무민은 그 절반의 책임을 대중의 망각에 물어야 옳다.
박 후보와 이 전 총재가 손을 잡은 지 사흘 뒤 안대희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쇄신의 대장정을 촉구했다. 그 정치쇄신의 주요항목에 선거쇄신이 포함돼 있다. 일체의 불법 선거자금을 근절하고 그 위반행위를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게 요지다. 하지만 박 후보에게 선거쇄신 의지가 있다면 말에 앞서 두 차례나 불법 대선자금에 연루된 이 전 총재와 거리를 뒀어야 마땅하다.
올해 하반기에 관심을 끈 영화 가운데 <MB의 추억>이라는 작품이 있다. 영화는 5년 전 이명박 대선 후보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꼼꼼하게 복기해 지금 상황과 비교한다. 대중의 망각이 어떤 잘못된 결과를 낳는지 경고하기 위해서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인상적인 장면 하나. “여러분,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놈입니다. 그러나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바보입니다!”
이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전여옥 전 한나라당 의원의 말이다. 우습지만 틀린 얘기는 아니다. 두 번 속으면 그것은 기억하지 못한 자의 책임이다.
< 한겨레신문 정재권 논설위원 >
< 한겨레신문 정재권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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