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5일(월) 아들이 갑자기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빠! 여기 학교 앞에서 난리가 났어요 폭탄이 터져 3명이 죽고 100명이 다쳤어요. 보스턴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긴급하게 보낸 텍스 메시지였다. 아들은 틈틈이 마리톤을 즐겼다. 학창시절에 <미시사가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달리기 선수였다. 이번에 보스턴 마라톤을 구경가려고 했는데 학기말 팀 프로젝트가 있어 빠질 수가 없어 밤샘을 하느라고 결승지점에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길을 가다가 차를 멈춰 길가에 세우고 보스턴에서 일어난 테러를 평화로 잠재워 달라고 기도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뮌헨> 이라는 영화가 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벌어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검은 9월’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은 사건으로 서막을 연다. 그들은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질로 잡은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한다. 분노한 이스라엘은 즉시 ‘비밀암살단’을 구성하여 치밀한 보복에 들어간다. 하지만 애국심이 넘치는 이 암살단은 목표를 제거할수록 자신의 임무와 복수 사이에서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보복하면서 시원해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117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미국에 원한을 품은 체첸 출신의 형제가 결승점에서 폭탄을 터뜨렸다. 범인들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시원해 하겠지만,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무고한 세 사람이 죽고 수 백 명이 다쳤다. 가장 어린 8살 아이가 죽고 그 누나는 다리를 자르고 어머니는 머리에 큰 손상을 입어 기억이 불투명하며 그 아버지는 파편이 박혀 고통스러워한다. 

요셉도 자신의 상처를 씻지 못했다면 테러범으로 애굽을 심판하였을 것이다. 평화는 용서로 시작된다.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화해는 쌍방이 동의 해야 하지만 용서는 일방적으로도 가능하다. 용서는 지난날 나를 괴롭히는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자기선언이다. 더 이상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기억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선포이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로 판 형제들을 용서하고, 노예로 부려먹다가 감옥에 가둔 주인 보디발을 용서하고, 그의 인권을 침해한 애굽 지도자들을 용서했다. 그는 애굽 백성의 기근을 자기 민족의 기근처럼 여기고 구제 정책을 폈다. 그는 바로왕과 이스라엘 형제들이 복된 만남을 하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야곱의 집안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에서도 ‘선한 목자’가 되었다. 참 목자는 자신의 유익을 좇아 원수를 이용하지 않는다. 바로왕은 요셉을 보고 애굽을 맡기며, 그의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푼다. 
당신이 요셉처럼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면, 헤어진 형제들을 만나 관계를 회복하게 되고 원수 된 애굽 민족과도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 박태겸 목사 - 캐나다 동신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