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게으르기로 소문난 농부가 있었습니다. 모두 밭으로 일하러 간 후, 그 게으른 농부만이 남아 빈둥거리다가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농부는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간 큰 도둑이 담을 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농부는 “어어, 도둑이네! 저놈, 담장을 넘어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며 다시 잠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내 다시 “쿵”하는 소리에 농부가 졸린 눈을 떠보니 도둑이 마당을 살금살금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집안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중얼거리며 다시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도둑은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와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농부는 잠에 취한 채 “저놈이 안방으로 들어가네. 뭐 가지고 나오기만 해봐라” 속으로만 중얼거렸습니다. 얼마 후 한 보따리 짊어지고 대문을 열고 나가는 도둑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꼬대처럼 농부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놈, 다시 오기만 해봐라”

이 이야기는 참 재미는 있지만 인간 게으름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게으른 자에 대한 많은 예들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특별히 잠언 22:13에서는 게으른 자를 “밖에 사자가 있다. 나가면 나는 그 사자에게 찢겨 죽을 것이다” 하면서 집안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이 글이 기록될 당시는 농경 사회였으므로,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장사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속 빈둥빈둥 놀면서 도무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게으른 사람이 일의 의무를 회피하는 방식에 시선이 모아져 있으며, 그 회피하는 방식은 바로 핑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게으른 사람들은 이렇게 핑계를 대는 것일까요? 왜 게으른 삶을 정당화하고자 끊임없이 변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자기 사랑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게으른 사람은 자신의 삶의 태도의 옳지 못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 충실하게 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 사랑은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을 위하는 부패한 성품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옹호해 주어야 할 육체의 요구와 죽이고 눌러야 할 정욕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붙드는 잘못된 자기 사랑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을 더 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인간의 게으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얻는 보람보다, 지금 당장 좀 더 편하게 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육적인 요구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의 위치와 목적, 그 하나님께 받는 사랑의 정체,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행복, 그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창조된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고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영적으로 변화 받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가를 깨닫게 되면 우리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화되기 마련이고, 온전한 자기 사랑도 그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잘못된 자기사랑의 표현! 게으름! 이제, 이 게으름에서 벗어나 새롭게 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최유민 목사 - 생활성결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