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정보원 입구. 검찰은 지난 4월30일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국정원은 지난 역사에서 많은 외도를 한 데 대해 겸허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이제는 국익에 전념하는 순수 정보기관으로 거듭나 정부의 국정목표 실현에 헌신해 달라.”
2008년 5월3일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이 한 말이다. 국정원도 이날 “과거 정치 관여 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그릇된 관행을 고쳐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는 순수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하는 ‘정치중립 선언문’을 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겉으로는 ‘순수 정보기관’이 되겠다던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뒤에서는 국내 정치에 개입하는 엄청난 ‘외도’를 저질렀다. 이들은 대북 심리전을 한다면서 실제로는 대국민 심리전을 했다. 4대강 사업 등 일상적인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가 하면 야당 대선후보들은 비방하고 여당 후보는 띄워주는 글을 썼다. 국정원의 외도는 일부 직원의 일탈이 아니라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른 조직적 범죄였음이 검찰 수사에서 밝혀졌다. 1997년 대선 때 안전기획부(부장 권영해)가 북한과 짜고 했던 ‘북풍 공작’과 같은 정치 공작의 부활이다.
 
정권의 앞잡이로 전락한 국정원을 박근혜 정부는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는 아니다. 대통령 자신부터 정보기관의 올바른 위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대선 직전 이번 일에 대해 오히려 “저를 흠집내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터무니없는 모략”(12월14일 기자회견)으로 보거나 “민주당에서 성폭행범이나 하는 듯한 수법으로 여직원을 감금하고 인권을 침해”(12월16일 텔레비전 토론회)한 사건으로 인식했다. 그 후 국정원이 불법적인 여론조작을 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날 때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박 대통령의 잘못된 생각은 곧 새누리당의 가이드라인이다. 당 지도부와 소속 의원들은 국회 대정부질문 등에서 “심리전은 국가 정보기관의 고유 업무”라며 국정원을 두둔하고 있다. “국정원 여직원을 사흘간 집 안에 감금한 인권침해도 지나칠 사안이 아니다”(심재철 최고위원)거나 “인사권을 미끼로 내부 정보를 빼낸 것은 국가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불법행위”(정우택 최고위원)라는 주장도 한다. 밤중에 절도범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외친 시민에게 단잠을 깨우는 소음을 일으켰다며 도둑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감금이라기보다 국정원 직원이 선관위와 경찰의 요구에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에 오히려 사법 방해 행위에 가까우며, 국정원장의 ‘지시·강조 말씀’을 외부에 제보한 것은 내부고발이라는 점은 애써 외면한다.
 
국정원을 정권 유지를 위한 시녀로 부릴 생각이 아니라면 박 대통령 자신이 과거 악습과 단절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 대통령이 지금처럼 침묵하거나 옹호하는 듯한 태도로는 국정원의 변화나 환골탈태를 기대할 수 없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원장 남재준)은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반성은커녕 내부고발자 색출에만 열을 올렸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7월 불법도청 사건이 터졌을 때 국정원이 철저한 자체 조사를 벌여 대국민 사과를 한 것과 대조적이다. 당시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로, 유사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단호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검찰 수사 발표로 국민의 시선은 다시 박 대통령의 입에 쏠려 있다. 침묵은 국정원이 다시 불행해지는 씨앗을 만들 수 있다. 공작의 수혜자이기에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를 외면하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추측이 오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박 대통령이 나서야 할 차례다.
< 김종철 정치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