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근혜’란 말이 있다. 박근혜가 아무리 이명박과의 차별성을 내세워도 결국 한몸이라는 뜻일 게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기대가 이렇게 일찍, 이렇게 철저히 무너질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정은 민주주의 훼손이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는 ‘헌법 제1조’라는 노래가 이명박 정부 초기 촛불시위 때 유난히 즐겨 불렸던 건 당시의 민주주의 훼손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한다.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명백한 국기문란 범죄다.
더 큰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박 대통령의 자세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 댓글 사건’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그 실체가 불분명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국정원 여성 인권” 발언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검찰은 최근 ‘국정원이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조직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한 사건’이라는 수사 결과를 내놓았다. 이쯤 됐으면 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발언을 사과하고, 수사가 미진한 부분에 대한 국정조사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는 어떤가.
그는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이 공개되자마자 국정원은 기다렸다는 듯 ‘정상회담 대화록’을 전격 공개했다. 본격적인 물타기에 나선 것이다. 국정원이 ‘법대로’ 알아서 했다는 말은 그만하자.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대통령 승인 없이 대화록을 공개했다면 그건 대통령이 직무를 포기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국가권력기구를 사조직처럼 운영했던 이명박 정부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자행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국익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며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을 물타기 하려 하고 있다. 민주주의 훼손이란 측면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보다 더 사악한 정권이다. 촛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건 당연하다.
남북관계는 또 어떤가.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며 남북관계를 파탄 일보 직전까지 끌고 왔다. 그래도 최소한의 관계는 유지했다. 천안함 사태가 일어난 와중에도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대북 원칙을 내세우며 북한을 압박했다. 그 내용을 어떻게 설명하든 ‘적당히 양보하고 타협하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북한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개성공단은 사실상 폐쇄됐고, 모처럼 성사될 것처럼 보였던 남북 당국자 회담도 격이 맞느니 어쩌니 하는 곁다리를 가지고 실랑이하다 무산됐다. 앞으로 박 대통령이 북한의 변화를 얼마나 이끌어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까지는 남북관계를 파탄 낸 대통령으로 낙인찍혀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라살림 꾸려가는 것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친기업을 표방한 이명박 정부는 고환율, 감세 등 기업 지원에 온 힘을 쏟았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단순 논리를 앞세웠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성장률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비아냥댔던 노무현 정부의 4.3%보다 훨씬 못한 2.9%에 그쳤다. ‘1 대 99’ 논쟁에서 보듯 사회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경제민주화와 창조경제를 내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는 이명박 정부보다 한 단계 진전된 것이긴 하다. 문제는 실천 여부다. 한쪽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외치면서 다른 쪽에서는 입법 속도를 조절하고 기업들 사기를 꺾지 말라고 을러댄다. ‘국정원 물타기’로 국회가 공전하면 경제민주화 입법 무산이라는 어부지리를 덤으로 챙길지도 모르겠다. 창조경제도 그 의미를 놓고 갑론을박하면서 배가 산으로 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줏대 없는 경제관료들은 그들 선배가 실패한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며 권력 눈치보기에 바쁘다.
박근혜 정부 출범 넉 달이 됐다. 겨우 넉 달 만에 ‘이명박근혜’임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명박 정부 5년의 실정을 거의 완벽하게 재연했다. 그것도 훨씬 더 악화된 모습으로.
< 정석구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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