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이민자들이 가장 당황하는 것은 언어장벽과 함께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비싼 세금에 꼬박꼬박 팁을 더해 음식값의 4분의 1이 넘는 부담이라든가, 생활화 된 더치 페이, 어린 자식과도 분명히 선을 긋는 재산문제. 자기들이 알아서 해치우는 결혼식, 너무 편하고 쉽게 치르는 장례, 거기에 선거문화와 내각제 정치체제의 유연성 등등, 과거 살아 온 고향 나라 관행이나 습속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어색하기만 한 생활문화의 차이가 한 둘이 아니다.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적응되어 있고, 자연스럽게 동화되어 어색함이 편함으로 바뀐 것들이 많아진다. 수십년 만에 모국을 다녀 온 이들의 입에서는 이제 여기가 더 편하고 살기좋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나오는 걸 본다. 오랜만에 가보니 어색하더라는 것부터, 모든 게 번잡하고 정신이 없더라, 너무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더라, 왜 그렇게 서로 으르렁대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탄식까지… 상황판단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아무리 세월이 가도 변치않는 고정관념이 있으니, 바로 모국 정치에 대한 감정적 판단이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국기문란, 민주주의 파괴범죄’로 규정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인들의 시위가 번지면서 미국의 한인동포들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다. ‘워터게이트’의 본고장에 사는 까닭에 ‘국정원 게이트’를 보는 시각이 남다른 때문일 것이다.
최근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 사건을 ‘국기문란, 민주주의 파괴범죄’로 규정한 시민단체와 대학생, 종교인들의 시위가 번지면서 미국의 한인동포들이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을 본다. ‘워터게이트’의 본고장에 사는 까닭에 ‘국정원 게이트’를 보는 시각이 남다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선 먼 산의 불처럼, “또 웬 시비냐”는 비뚤어진 애국심의 발로들도 접한다. 국가기관이 위법적인 행위를 해도 괜찮다는 뜻인지, 원래 정보기관이 그런 짓을 해오지 않았느냐는 무뎌진 인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듣기 싫다는 것인지, 도통 납득이 안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비호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워터게이트 보다 한 술 더 떠 엄연히 국가기관이 해선 안되는 민의 왜곡과 선거에 영향을 줄 불법 범죄혐의를 검찰이 밝혀냈는데도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쓴 유명한 풍자소설 ‘걸리버 여행기’에는 주인공 걸리버 보다 작거나 크고, 사람을 말이 지배하는 등 상상 이상의 괴상한 나라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인들의 나라에 간 걸리버는 고국 영국에서 일어나는 집회라든가 변호사들, 전쟁 등에 대해 설명했다가 왕에게서 “그대의 민족은 세상 표면에 기어다니게 된 생물들 가운데 가장 유해하고 밉살스러우며, 작은 벌레들의 모임인 것으로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라는 비참한 평가를 듣는다. 하늘을 나는 섬나라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학설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그 일에 중독되게 만드는 허풍나라를 경험한다. 또 마지막엔 사람들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사는 말들의 세계를 간다. 그 곳에서 인간은 냄새나고 거칠며 포악한 존재들이다. 그런 인간들에 증오감과 자책감을 가졌던 걸리버는 고국에 돌아와선 가족과도 식사와 대화조차 못하는 병증으로 고통을 겪는다. 이질감의 후유증일 수도 있고, 허상과 실상 사이의 동질감을 비꼬는 작가의 신랄한 감정 표현일 것이다. 물론 풍자 소설일 뿐이며 경우는 다르지만, 이민자들 처지에서 고국과 이민지에서 접하는, 다른 상황과 관습 속의 이성적인 가치평가, 더 넓게는 사회정의 판단 등의 일관성 측면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 없지않다.
오래 산 이민자들은 거의 모국과 이민 삶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 비단 혼례나 장례문화의 그 것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여러 문제들의 좋고 나쁨, 정의와 불의, 선함과 악함의 정도와 수준에 대한 판단들은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실제에 있어 우리들 주변을 보면 이중적인 이질감의 세계에 살고있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걸리버와 같은 고뇌조차도 없이-. 쉽게 말하면 이민 땅에서의 정의와 모국에 대한 정의 개념, 그 잣대와 평가 기준이 너무 다름에 놀라는 것이다. 일례로 사상적인 트라우마나, 지역·혈연에 대한 유대 혹은 소원함, 독재에 대한 무딘 감정 등의 불변 혹은 고착개념이 바로 그 것이다.
이민자는 정의가 두 종류고 양심도 둘일까? 마치 걸리버가 여행한 거인국에 우리가 살고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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