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국정원)에 대해 중학생에게 물어보면 “나라를 위해 중요한 일을 하는 곳”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고등학생만 돼도 벌써 “야당을 사찰·도청하고 선거 때 여당 쪽이 이기도록 공작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국정원이 감행한 여론공작은 이제 국회 국정조사와 당시 원장 원세훈씨에 대한 재판에서 밝혀져야 한다. 어쩌면 당시의 대통령 이명박씨와 국정원 대선공작의 수혜자가 된 박근혜 대통령이 증언대에 설지도 모른다. 국회 국정조사와 사법부의 재판이 얼마나 엄정하게 이루어지느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 가부가 결정될 것이다.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지원하고 야당 후보를 폄하하는 댓글 달기, 곧 국민여론 조작을 통한 선거공작이나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록을 공개하는 정도의 큰 결정에서 국정원이 대통령의 허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 태생적 정체성과 성장과정으로 미루어 체질상 그렇다.
일각에서는 국정원 직원의 댓글이 대선 결과를 뒤바꿀 정도가 아니었다고 선을 긋는다. 참으로 웃지 못할 둔사가 아닐 수 없다. 워터게이트 도청이 당시 대선 결과를 뒤엎을 만한 것이어서 닉슨이 대통령직을 반납했단 말인가.
국가정보기관이 공작 대상으로 삼은 대선은 그 정당성을 의심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일반 공무원이 나섰다면 선거개입이지만, 정보기관이 비밀활동을 한 것은 ‘선거공작’이다. 부정선거의 수위가 다른 것이다.
많은 국민이 대선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민심의 위기 상황에서 나온 것이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였다. 그런 일련의 행위들에 대해 ‘국정원 쿠데타’라는 말이 나돌았다.
9000여명에 이른다는 국정원 직원이 모두 가담자는 물론 아니다. 항상 소수의 명령자들이 문제다. 국정원은 원장을 통해 대통령의 명령만 따르는 조직이다.
국정원의 뿌리는 5.16 쿠데타 세력이 조직한 중앙정보부와 5.17 내란 정권이 명칭을 고친 안기부다. 가장 타기시해야 할 중정-안기부-국정원의 태생적 체질은 국민주권 유린과 헌정문란에 있다.
1969년 삼선 개헌과 72년 유신 선포 때도 중정은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여야 가릴 것 없이 고문·협박하는 공포통치기구였다. 전두환 정권 아래 안기부의 기상천외한 선거공작은 북한까지 끌어들인 북풍과 총풍 사건이었다. 국민의 대북 안보의식에 불을 질러 보수세력에 유리한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안기부는 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무력시위를 벌이도록 공작했다. 97년 12월 대선 직전엔 북한 쪽에 총을 쏘아 달라고 주문해 총풍 사건을 일으켰다.
국정원의 이번 대선공작은 국민 여론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북풍이나 총풍과 동질적이다.
국정원의 겁 없는 행동은 그 과잉 집중된 정보수사 기능의 힘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집중화·영속화·자기확장이 생리다. 그렇게 비대해진 힘으로 결국 자기 이익을 도모하면서 국민주권을 유린한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공작까지 감행하게 된 배경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을 분립시키고 제한을 가해야 하는 이유다.
우선 국정원은 수사권을 내놓고 전문적 정보기관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정보수집도 국내는 내놓고 북한을 포함한 국외에 국한해야 한다. 정치권에 종북세력이 있고 또 산업스파이를 막아야 하니까 안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궤변이요 권력의 자기방어일 뿐이다.
냉전시대에도 미국은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이 나뉘어 역할수행을 잘했다. 영국의 경우 국내보안국(MI-5)과 대외첩보국(MI-6)이 또한 그랬다. 프랑스도 대외보안총국(DGSE)과 국토감찰국(DST)이 협력과 상호견제를 해 나간다.
대선공작까지 감행하는 괴력의 정보기구를 제대로 수술하지 못한다면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 김재홍 -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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