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야권 일부 인사의 발언을 두고 대선 불복이 아니냐며 연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민주당에 대선에 불복하는지를 분명히 하라고 요구하는가 하면 친노 세력이 그 진앙이라며 공세를 펴고 있다. 막말 정국이 어느새 ‘대선 불복’ 정국으로 변한 형국이다. 여권은 말꼬투리를 잡아 야당의 예봉을 피해보려는 모양인데, 이는 국가정보원 사태의 심각성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지금 야권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대선이 무효라거나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하고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이를 시정하려 들지 않을 경우 더욱 큰 위기에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도 모자라 새 정부에서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등의 정치개입을 버젓이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야권은 박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심이 이를 방관하고 용인함으로써 사태를 더욱 키우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의 발언만 해도 그렇다. 그는 지난 14일 “중앙정보부를 누가 만들었나. 박정희가 누구이고 누구한테 죽었나. 박씨 집안은 안기부, 정보부와 그렇게 인연이 질긴가. 이제 국정원과 단절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달라. 그래야 당신의 정통성이 유지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을 지칭한 ‘당신’이란 말의 인칭 구조를 두고 불필요한 논란이 있었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틀린 구석을 찾기 어렵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 문제를 결단하지 않으면 더 큰 우환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 치하에서 옥살이까지 한 이 전 총리가 박 대통령 부녀를 두고 이 정도 고언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야당의 책임 있는 인사 중 누구도 대선이 무효라거나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발언을 한 이가 없다. 이른바 ‘귀태’ 발언은 정치적 무게가 실렸다기보다 막말에 해당한다. 문재인 전 대선 후보가 “대선이 대단히 불공정하게 치러졌다”고 한 것은 국정원과 경찰의 조직적 관권 개입의 심각성을 지적한 것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도 대선 불복이 아니란 점을 거듭 강조했다.
지금의 여권 행태를 보면 국정원의 정치개입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얄팍한 전술로 야당 예봉을 꺾는 데만 골몰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단기적 효과를 거둘지 모르지만 민심의 도도한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거리의 촛불은 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를 대선 불복이라는 주관적 틀로 꿰맞추는 것은 잘못이다. 여권은 하루빨리 국정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근본적인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8일 국가정보원 사태와 관련해 “이번 기회에 국정원이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했다. 강도 높은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한 것인데, 오랜 침묵 끝에 국정원의 대수술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일단 긍정적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언급은 국정원 사태의 심각성에 비춰보면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해법도 제대로 됐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박 대통령이 국정원으로 하여금 개혁안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국정원더러 자체 개혁안을 만들어 스스로 개혁에 나서라는 것인데 이는 온당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국정원은 이미 자체 개혁을 할 수 있는 동력도, 명분도 잃은 지 오래다. 국정원이 댓글 사건으로 대선에 개입한 것만으로도 존폐를 논해야 할 상황이다. 더 나아가 ‘남재준 국정원’은 국회 국정조사를 막겠다고 백주에 남북 정상의 대화록을 공개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만일 박 대통령의 이 발언이 남재준 원장 체제에 대한 신임을 토대로 국정원을 개혁하겠다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 원장은 남북 정상의 대화록을 앞장서 공개하는 순간 정보기관 수장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다. 그런 이더러 국정원 개혁을 자체적으로 주도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대화록 공개의 배후에 박 대통령이 있었다는 점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정원을 둘러싼 산적한 과제가 있지만 남 원장 경질은 시기의 문제일 뿐 기본에 해당한다는 점을 박 대통령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북방한계선(NLL) 논란과 관련해 “이것이 뚫리면 순식간에 영토를 빼앗길 수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생명선”이라고 종전의 언급을 되풀이한 것 역시 실망스럽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NLL 발언은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 등을 통해 더 이상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않을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이 점을 애써 무시한 채 보수진영의 억지 논리를 되풀이하는 것은 책임 있는 지도자의 자세가 아니다.
박 대통령이 국회의 국정조사가 시작되는 시점에 국정원 댓글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밝히고 재발하지 않도록 하자고 언급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대선 당시 자신이 이 사건을 국정원 여직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호도한 데 대해서 사과해야 마땅했다. 그리고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정원 개혁을 남의 일처럼 국정원이나 국회에만 맡겨둘 일은 아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사태의 엄중함을 깊이 인식하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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