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아이들이 더러운 물건을 입에 가져가려 할 때.. 아가 지지야 지지 ! 그렇게 말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우리는 당연하게, 쉽게 이 단어를 써왔다. 나 역시 무의식적으로 지저분하다는 뜻이겠거니 했는데 그 말에 심오한 의미가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지지라는 말은 주역에 ‘능히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친다’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며, 노자의 도덕경 44장에는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곳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갈 수 있다)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또한 불교에서 지지는 ‘몸과 말로 하는 나쁜 짓을 억제하여 죄업을 짓지 아니함’ 을 뜻하는 용어다. 결국 知止(지지)하라는 뜻이겠다.
이규보(1168-1241)는 ‘파한집’,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등의 작품을 남긴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 학자중의 하나다. 그는 아홉 살에 시를 지어 신동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며 원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진정표’( 陳情票) 라는 외교문서를 통해 몽골군을 스스로 물러나게 할 만큼 시재가 뛰어났지만 그 일생은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무신의 난이 일어났고 그는 평생을 무신 집권하의 문인으로서 미관 말직과 유배지를 오가며 살아야 했다. 그는 훗날 개경 동쪽에 초가를 짓고 그 거처를 지지헌(止止軒)이라 명하였다. 지지헌기(止止軒記)에서 그는 “대저 이른바 지지라는 것은 능히 멈춰야 할 곳을 알아 멈추는 것을 말한다. 멈춰야 할 곳이 아닌데도 멈추게 되면 그 멈춤은 멈출 곳에 멈춘 것이 아니다’ 라고 했다.(국문학자 정민 교수의 해석)
정민 교수는 또 ‘지지’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첫째, 그칠 수 있을 때 그쳐야 한다. 나중엔 그치고 싶어도 그칠 수 없다. 둘째, 그쳐서는 안될 곳에 그쳐서도 안된다. 설자리 앉을 자리를 가려야 한다.’ (정민, 죽비소리, 2005)
지지(止止), 이것이야말로 고려 말,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아내며 그가 터득한 삶의 방식이며 철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 시대만의 삶의 철학이겠는가.
오래 전부터 선조들이 아이들에게 그침의 지혜를 말없이 가르친 이유를 새겨 볼만하다
며칠 째 止止를 생각하고 있어서였을까? 지난 주말 한 연예 프로그램에서 아빠와 아이들이 게임을 하면서 부르던 동요가 번쩍하고 귀에 들어왔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 눈도 감지 말고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움직이지 마 /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 서 있지도 말고 앉지도 말고 눕지도 말고 움직이지 마…’
제목을 찾아보니 ‘즐겁게 춤을 추다가’라는 노래다.
주위를 돌아보면 멈추고 그쳐야 하는 자리가 어디인지 한참 모르는 어른들이 너무 많은 세상..
머물러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분별하기 위해 가끔은 멈추어 서라고 아이들은 노래한다. 그리하면 보일 것이다.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가.
< 김유경 시인 - ‘시.6.토론토’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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