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국가 권력이 이념 선동을 직접 기획하고 행사한다. 이를테면 ‘이데올로기 포르노’를 상영하는 극장이다. 일방적이고 노골적이며 말초적인 동어반복이란 의미에서 ‘포르노’다.
그런데 시민들에게 닥치는 대로 ‘종북’ 딱지를 씌워 공격하는 국가정보원과 소위 ‘보수언론’ 및 ‘애국보수세력’들의 행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념 극장’ 북한의 속성과 끔찍할 정도로 닮았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시도와 인터넷 여론 조작은 남한 지배 권력과 북한 지배 권력이 권력 유지를 위해 얼마나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지, 또 얼마나 서로가 닮았는지를 가장 수치스런 형태로 환기시킨다.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잇따르고 국정조사가 결정되었는데도 국정원은 당당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구속영장(알선수재 혐의)이 발부된 날, 국정원은 기습 성명을 발표해 “노무현 대통령 엔엘엘(NLL) 발언은 휴전선 포기나 마찬가지”라며 또다시 남북정상회담 내용을 자의적으로 왜곡했다. “자체 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제2의 개혁을 하겠다”고도 한다. 임기가 아직 4년 반이나 남은 박근혜 대통령은 “스스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의회 다수당은 ‘NLL 포기’ 논란을 주도한 새누리당이다. 저들의 결기와 오만이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할 만하다.
국정원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뿐 아니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포털사이트나 커뮤니티 대부분에서 ‘댓글 공작’을 벌였다. 그중 일베 등의 우익 성향 사이트들은 이들에게 최적의 활동 공간이었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남긴 댓글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는데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알잖아… 간첩들이 폭동 일으켰다는 거”, “홍어종자 절라디언들은 죽여버려야 한다”, “아따 전(두환) 장군께서 확 밀어버리셨어야 하는디 아따.”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른 넷우익 현상의 ‘몸통’이 바로 국정원이었던 걸까? 확실히 현상을 좀더 증폭시킨 면은 있을 게다. 하지만 인종주의, 호남 차별, 여성 혐오, 반이주노동자 담론 등은 국정원 직원 몇몇의 ‘댓글 공작’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별도의 분석이 필요한 사회문제다. 시민들의 혐오 발언을 국가가 나서서 형사처벌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흔들 수 있기에 아무리 신중해도 지나치지 않다. 반면 국정원 여론 조작은 정보기관의 정치 개입이라는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다. 오히려 이런 시도의 근절이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정원의 여론 조작에 대해 어떤 이들은 ‘안보기관이 공동체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해 결과적으로 안보를 해쳤다’는 점을 들어 비판한다. 소위 사회통합론에 기반한 일리 있는 주장이다. 첨예한 갈등이 사회가 진보하는데 일정부분 필요하긴 하지만 국가기관이 갈등과 분열을 보장한다면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다. 특히 국가권력이 ‘이념 전쟁’의 형태로 여론에 개입할 경우, 다양하게 분출하는 사회적 여론과 공론들 대신 특정한 갈등만 부각되고 약자의 목소리는 공론장에서 더 배제되기 쉽다. 요컨대 국정원이 나쁜 진짜 이유는 엄밀히 말해 갈등의 조장 뿐만 아니라 어떤 갈등의 특권화, 즉 ‘갈등의 은폐’다.
무엇이 문제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지고 있다. 중정-안기부-국정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이 조직이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공동체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보다 권력자를 위해 국민을 기만하고 탄압하는 기능에 충실했다는 점이 또렷이 드러난다. 국정원은 이미 괴물이다. 저들은 개혁 대상이지 개혁의 주체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정보공개 관련법을 포함해, 썩어 문드러진 조직에 대한 전면적이고 외과수술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국정원이 ‘관제 극우파’로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박권일 - 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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