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태’ 논란이 속히 정리된 것은 다행입니다. 야당의 지나침을 낚아채 국면을 180도 전환시킨 뒤, 모자란 듯한 수준에서 상황을 정리하는 걸 보면 행마가 절묘합니다. 누구의 기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공격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게 이정현 홍보수석이었으니 청와대 작품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날 야당의 저질 공세를 에둘러 비난했던 이 수석은 이튿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능멸하고, 타도와 소멸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격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새누리당은 이를 받아 대변인이 홍익표 의원의 사퇴와 민주당의 책임있는 조처를 촉구했고, 최경환 원내대표는 대통령기록물 열람 등 모든 국회 일정 중단 방침을 천명했고, 황우여 대표는 최고위원 회의까지 소집해 민주당에 대한 말폭탄을 쏟아부었죠. 지휘부의 기획과 지시에 따라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일사불란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게다가 홍 의원이 사과하고 원내대변인직에서 사퇴하자 곧바로 국회 일정을 정상화시킨 것은 더욱 세련돼 보였습니다. 나아가고 물러섬에 빈틈이 없었죠. 하긴 그 정도면 대박이었죠. 옛날 노무현 대통령에게 새누리당이 던진 막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하튼 작전은 성공이었습니다만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함께 풀어야 할 상대방의 가슴에 불신과 화병만 더 쌓이게 했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해결보다는 대결 쪽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당면한 국정원의 대선 공작, 그리고 정치 공작 문제는 그런 상대의 실수에 기댄 게릴라 작전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청와대가 발끈한 것은 과도한 표현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선 불복 주장이 본격적으로 튀어나오는 문제 때문이었을 겁니다. 대선에서 맞붙었던 문재인 의원은 그동안 ‘개표 부정’ 주장이 끈질기게 제기됐지만, 그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댓글 공작 자체에 대해서도 시비를 가려야 한다는 수준에서만 언급했습니다. 경찰의 증거 인멸과 거짓 발표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수준에서 촉구했습니다. 선거 불복 등의 주장에 대해선 지나치리만큼 경계했습니다. 적잖은 지지자들은 문 의원의 그런 신중함을 불만스러워했지만, 그는 적어도 이 정부 탄생의 절차적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태도가 바뀐 것은, 국정원의 공작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대통령이 이를 두둔하거나 방치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청와대가 먼저 언급한 뒤 국정원이 남북 정상의 대화록을 공개한 사실, 님이 국정원 개혁은 국정원이 알아서 해야 한다고 말하자 국정원이 보란듯이 국회의 국정조사를 무시하는 성명을 발표한 사실 등은 그 근거가 되고도 남습니다. 이런 태도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의 중앙정보부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억지와 궤변 그리고 공작으로 덮으려는 국정원, 거기에 신뢰를 보내는 대통령, 그래선 안 됩니다. 여당 안에서도 우려의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문 의원은 지난 선거가 매우 불공정하게 진행됐다고 발언의 수위를 높였고, 주변에선 불복 이야기가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청와대로선 지켜보기 어려운 긴급 상황이었는데, 홍 원내대변인이 빌미를 제공한 거죠.
홍 대변인의 설명과 달리, 귀태란 한국의 박정희 정권이나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 정권을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태란 탯줄이나 태반 등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을 말합니다. 태아를 잉태하고 키우는 장기입니다. 귀태의 출처인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 저자 강상중 교수는 박정희 정권의 국가주의와 개발독재는 그가 장교로 복무했던 만주국에서 유래한 것이고, 만주국의 이런 정신과 정책을 세운 것은 기시 노부스케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두 잘못된 정권을 잉태하고 키운 것은 만주국이고, 만주국은 두 정권의 태반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귀태란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 혹은 정권’이 아니라, 그런 정권을 배태한 만주국을 두고 쓴 말입니다. 박근혜 정부를 귀태라고 하는 건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다음 물음만큼은 숙고해야 합니다. 박정희, 기시 정권을 잉태한 태가 만주국이라면 지금 지금 정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출범한 지 벌써 4개월이 지났지만, 박근혜 정부는 보이지 않습니다. 창의경제, 국민행복, 복지, 일자리, 신뢰 프로세스 등 님의 약속은 실종됐습니다. 최근 당정청 수뇌회의에서 새누리당이 정부를 질타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을 겁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겠죠. 반대로 드러나선 안 될 국정원만 전면에서 활개치고 있습니다. 아예 국정을 주도하려 듭니다. 대통령은 그런 국정원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총체적인 대선 공작으로 이 정권의 산파로 지목되고 있는 국정원을 통해서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귀태란 국정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작을 통해 탄생에 일조했고, 출범 정부 초기 인큐베이터 구실까지 하고 있으니, 태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정보기관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고 또 하고 있으니 귀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국정원을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아버지의 공포정치와 장기집권이 중앙정보부 때문에 가능했지만, 몰락을 재촉하고 종결자 구실을 한 것도 중정입니다. 그런 국정원이 설치는 한 귀태 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대선 공작이란 원죄까지 있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국민과 이 정부를 위해서도 국정원 논란을 속히 종식시키시기 바랍니다. 귀태를 추구해온 국정원장부터 경질해야 합니다.
< 곽병찬 대기자 >
< 곽병찬 대기자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1500자 칼럼] 지지지지 (0) | 2013.07.23 |
---|---|
[칼럼] ‘관제 극우’라는 사회악 (0) | 2013.07.23 |
[사설] ‘대선 불복’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0) | 2013.07.23 |
[1500자 칼럼] 목회와 야구 (0) | 2013.07.14 |
[칼럼] 국정원이 다시 태어나야 할 이유 (0) | 2013.07.14 |
[사설] 대화록 유출, 특별수사팀이 철저 규명을 (0) | 2013.07.14 |
[사설] 개성공단, ‘정경분리’ 원칙으로 풀어야 (0) | 2013.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