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여성운동은 세계 여성운동사에서 꽤 성과를 거둔 경우에 속한다. 그중에서도 1990년 진보적인 여성단체들이 결성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줄여서 정대협)가 중심이 되었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은, 여성인권운동을 한 단계 도약시킨 사례이다. 운동 초기에는 폭력에 시달린 할머니들의 아픔이 치유될 수 있게 헌신적인 활동가들이 할머니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드렸다. 변영주 감독은 그분들에게 스스로 카메라를 쥐게 하여 영화 <낮은 목소리>를 만들어내게 함으로써, 그분들이 ‘사회적 발언자’로서 새로 태어날 수 있게 도운 초기 활동가 중 한 명이다. 여성운동을 통해 비로소 입을 열게 된 할머니들은 인권운동가이자 치유사로 거듭나셨고, 22년째 계속되는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수요집회는 살아 있는 역사 교실이자 평화를 기원하는 세계 시민들의 허브로 자리잡았다. 유엔이 일본군 위안부 사안을 전쟁범죄로 규정하게 한 것도 이들의 활약 덕분이다.
여행 중에 나는 이 운동이 미국에서 새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7월30일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에 있는 공립 도서관 뜰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글렌데일시가 주도한 이 행사에서 사회를 본 로스앤젤레스 가주한미포럼 대표와 글렌데일 시의원들은 상당히 흥분한 어조로 경과보고를 했다. 일부 일본계 시민들과 일본 총영사의 항의가 거셌지만 해야 할 일을 해낼 수 있어서 기쁘다는 이야기였다. 태평양을 건너온 위안부 생존자 김복동 할머니는 광화문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이 미국에도 세워진 것을 보니 ‘절반은 성공’이라며, 아베 총리와 오사카시장, 도쿄도지사 등이 계속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세계 전역에 ‘평화의 소녀상’이 들어서게 할 것이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제막식 전야제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할머니, 인신매매 생존자인 필리핀 여성과 김복동 할머니가 만나는 감동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인간이 감히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역사를 어루만지는 그 자리에는 목사와 스님과 신부와 랍비들도 와 있었다.
제막식 뜰에는 아베 총리 얼굴에 나치 표지를 덧붙인 피켓을 든 중국계 미국인도 있었고 ‘시민적 권리와 발언을 위한 일본계’(영어 약칭 NCRR)라는 시민단체 회원들도 있었다. 그 단체의 대표 마사오카씨는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정부가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수용소에 몰아넣는 위헌적 일을 저질렀는데, 1988년에 이에 대한 사과를 했다면서 후대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07년, ‘위안부’ 사안을 ‘20세기 최대 규모의 인신매매 사건’으로 규정한 결의안을 미국 하원에서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한 마이크 혼다 의원은 일본계 3세였다. 그는 어린 시절을 일본인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교사 출신 하원의원이다.
미국에는 이미 6개의 기림비가 세워졌고 많은 지역에서 기림비 건립을 추진중이다. 이 움직임은 기성 언론이 부각하듯 한-일 힘겨루기의 장이라기보다, 미국에서 이민자 집단이 나름의 자리를 잡아가는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세우는 일에 참여할 때 비로소 온전한 사회 구성원이 될 자격을 얻는다. 기념비 건립은 역사를 다시 쓰고 기억하는 소통의 행위이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헌신하는 분들은 몸은 미국에 살면서 온통 관심을 고국에 두고 있는 교민 1세대와는 달리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상생의 삶을 일구어내기 위해 협력하는 새로운 세대인 듯하다.
미국에서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조만간 1992년 4•29 로스앤젤레스 폭동에 대해서도 발언을 시작할까? 그리고 그런 활동이 무르익으면 ‘망각의 시간’ 속으로 퇴행하고 있는 듯한 한국 사회에 반가운 선물을 안겨다 주지 않을까? 문득 역사를 기억하는 글로벌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 여행이다.
< 조한혜정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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