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구인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을 받으러 5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북한체제 중심 사고는 진보정당이 청산했어야할 과거”
사회 보수화 고착화 우려
“진보정당, 당위·원칙 앞세우지 말고 유권자 마음 얻을 현실적 대안을”
“진보라는 이름을 향한 신뢰는 바닥이다.”(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이제 간판을 내걸 수 없다.”(이상돈 전 중앙대 교수)
이석기 통합진보당(진보당)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국정원의 수사로 진보정치는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1997년 건설국민승리21 창당을 시작으로 이른바 ‘제도권 정치’에 발을 들인 진보진영은 2004년 4월 제17대 총선에서 10석을 획득하며 대안세력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후 ‘종북 논란’과 자주파(NL)-평등파(PD)의 노선 투쟁, 경선부정 시비 등으로 분당과 합당, 재창당을 거듭하며 분열됐고, 종북 논란의 중심에 선 진보당은 정당 해산을 압박받는 지경까지 내몰렸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 의원을 비롯한 진보당의 말바꾸기 등 사태 수습 과정의 미욱함은 진보정당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냈을 뿐 아니라, 진보정치세력의 최대 자산인 진정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진단했다.
현재 진보정치가 직면한 위기는 2007년 일심회 사건, 2012년 비례대표 경선 부정 논란 등을 겪으면서도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북한을 추종하는 일부 과거지향적 정파를 진보정치세력 안에서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는 분석이 우선한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이석기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 체제 중심의 사고는 진보정당이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청산했어야 하는 과거였다. 이 의원 사건은 지금까지 이어진 진보정당의 (북한 중심 사고 청산의) 실패가 반복된 결과”라고 말했다.
과거 70~80년대 독재에 맞서 반정부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반정부=진보’라는 경험을 공유한 진보정당의 각 정파가 제도권 정치인 의회로 진입한 뒤에도 서로를 온정적으로 바라보며 국민의 의식과 시대 변화에 따라 진화하지 못한 채 사실상 ‘화석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채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헌법적 가치나 국민 정서를 고려하지 못하고 반정부 투쟁이라면 일단은 동지적 유대관계를 인정하는 온정주의가 신념으로 (고착)되면서, 북한의 세습과 참주 형태를 추종하는 낡은 세력과 진보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르고 말았다”고 했다.
위기의 원인으로는 진보당 당권파가 갖고 있는 공감의 부족도 꼽힌다. 장덕진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진보정치가 대중 기반을 가지려면 공감이 필수다. 특히 보수세력처럼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익이나 가치로 지지받는 진보세력은 공감의 과정이 중요한데 이석기 의원 사건은 그 기반을 잃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이 의원 등을 내란음모 혐의로 수사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끊임없이 말을 바꾸고, 결국은 “농담이었다”는 식의 해명을 내놓는 진보당의 모습이 결국 진보적 대의명분과 가치로 국민 다수의 공감을 얻어야 할 진보진영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위기가 진보당의 정치적 몰락에 그치지 않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불평등을 개선할 각 부문 대변자들의 존립 기반까지 뒤흔들어 우리 사회의 보수화를 더욱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박상훈 대표는 “단순히 진보진영이 표를 얻는 것을 떠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보수편향적 경향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잃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보수편향·계층편향적인 구조가 고착화될 것”이라며 “결과적으로 진보정치만 망친 게 아니라 노동운동도, 빈민운동도 모두 망쳐놓을 위험이 높다”고 우려했다.
진보의 위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더한 심각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덕진 교수는 “보수진영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보겠지만, 사실은 같이 망해가는 것이다. 정치가 국민의 삶과 괴리되고 무관심의 영역으로 가는 순간 우리 모두가 몰락하는 총체적 난국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진보세력에 표를 던지던 유권자들의 이탈로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 확대되면 일본처럼 정치가 국민의 삶과는 유리돼 정상적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정치의 활로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가장 먼저 진보당이 북한에 대한 입장,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 인정 여부, 한반도 평화 등에 대해 견해를 분명히 하고 다시 유권자들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박상훈 대표는 “대한민국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당에서 벌어진 이번 일에 대해 시민들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의원이나 진보당의 남북한 체제 평가, 남한을 향한 군사적 방법 동원 등에 대한 해명이 상식에 부합하느냐와 그 태도가 진정성이 있느냐였다. 하지만 현재 어느 것도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념성과 편견을 드러내는 집단이 더이상 허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생겨난 듯하다”며 “통합진보당의 변화가 없다면 이 여파가 진보정치 전체에 미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진보정치의 형식과 내용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과)는 “현재 민주당도 진보정당이 아니라 자유주의 정당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헌법적 틀 안에서)보수 쪽의 자유민주주의, 진보 쪽의 사민주의 방향으로 제도정치권이 재편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복경 연구원은 “시장을 강조하는 보수정당에 비해 복지와 참여를 동시에 이끌어야 하는 진보정당 쪽에서 유권자를 설득하기 위한 구체성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진보정당은 당위나 원칙을 앞세우지 말고 유권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현실의 대안을 발굴해가야 한다”고 했다.
<하어영 조혜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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