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오래된 수첩

● 칼럼 2013. 9. 16. 18:48 Posted by SisaHan
나는 비겁하다고 지인들에게 가끔 얘기한다. 누구나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그들은 나를 위로해준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다. 오래된 기억의 수첩을 들춰보면 내가 비겁한데는 정당한 이유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군대생활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무의식으로 숨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얼마전 모국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세포들이 감전된 듯 한순간 정지됐다. 되새기고 싶지 않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허일병 조작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30년을 끌어온 법정 싸움이 그 뉴스였다. 
지난 1984년 발생했던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을 파헤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4월2일 중대본부에서 술파티가 열렸다. 당시 모 중대장이 “라면이 맛이 없다”며 모 선임하사를 질책하자, 문제의 하사관은 만취상태에서 중대본부를 나와 행패를 부리다 허일병을 향해 우발적으로 자신의 M16 소총을 발사, 허일병은 오른쪽 가슴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당시 사건 은폐를 위해 대대급 간부까지 참여한 대책회의가 열렸고, 허일병의 피살현장을 목격한 사병들을 대상으로 “알리바이 조작” 등을 위한 특별교육까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은 그러나 이것을 자살이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을 내 경우에 대입해보자. 
1978년 여름 내가 복무하던 서울의 한 부대에서 취침점호시 갓 전입한 이등병이 사망했다. 점호시 나는 행정반에 있었고 얼마후 1소대 내무반장이 찾아와 한 이등병이 죽은 것같다고 전했다. 장시간 축구를 해도 멀쩡했던 내무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사태파악에 나섰다. 한 이등병이 운전업무후 점호시간 조금 전에 도착했고 한 고참병이 군기를 잡기 위해 복부를 가격했다는 것이다. 몇 대 맞은 이등병은 갑자기 얼굴이 파랗게 질려 침상에 쓰러졌다. 이때 당직사관이 점호를 위해 내무반에 들어오는 바람에 이등병 얼굴을 담요로 덮었다. 그리고 난 후 다시 확인해보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부대는 발칵 뒤집혔고 퇴근한 중대장이 돌아오고 곧 대대본부와 보안대에서도 요원들이 파견됐다.
물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피해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정리됐다. 모든 중대원들에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특별교육이 실시됐다. 병사가 한 명 사망하면 기록하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16가지가 넘는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사고를 낸 고참병은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혹 스트레스로 인해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걱정때문이었다. 그후 그는 외박을 나간 뒤 며칠씩 부대복귀를 하지 않아 부대간부들의 가슴을 조이기도 했다. 그는 제대 후 시청의 공무원으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을 죽인 죄책감으로 힘들게 살고 있을 것이다.
 
허일병을 쏜 것으로 알려진 하사관은 어떻게 됐을까. 사건발생 직후 아무 징계조처도 당하지 않고 사단내 다른 중대로 전보된뒤 승진해 90년초 상사로 예편했고, 이 하사관은 위원회 조사에서 “술에 만취해 총을 잡은 것 같지만 그후 기억이 없다”고 진술했다.
S.프로이트는 의식에 있어 고통스러운 것, 허용될 수 없는 것, 온당치 못한 것은 억제되어 무의식의 세계로 추방된다고 말했다. 
나는 내게 묻는다. 아무에게도 말못했던 이 사건을 이제서야 말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폐쇄된 한 조직의 일사분란한 행동에 그냥 따라갈 수 밖에 없었던 불쌍한 나를 용서해본다. 그 무의식을 끌어올려 화해를 청한다. 내가 비겁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어쩔 수 없었던 것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폭력이 있다 나도 폭력 앞에서는 아버지! 하고 무릎 꿇는다 멍텅구리 배안에선 어쩔 수가 없다.”
-이성복 시인의 시 <멍텅구리 배 안에선> 부분.

< 김형주 - 시인, 해외문학 신인상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부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