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검찰총장 축출은 박근혜 정권의 현재와 미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뻔한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특정 언론과 공모해 채 총장을 쫓아내려 한 것은 박 정권에 그 일이 그만큼 중차대한 사안이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박 정권의 순항 여부도 좌우될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사건을 통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아버지한테서 보고 배운 게 ‘정치’가 아닌 권위주의적 ‘통치’였으니 크게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의 비민주적인 국정 운영 방식은 갈수록 강화되는 듯하다.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몰아낸다는 것은 단순하게 넘길 일이 아니다. 감사원장과 경찰청장도 임기 중 중도하차시켰다. 이들의 임기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과 법률체계를 깔아뭉갠 것이다. 이는 5년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도 임기 중에 그를 선출한 국민들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는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만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일 테니까.
채동욱 총장을 축출함으로써 박 대통령은 국가 권력기관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박 정권 출범 이후 눈에 거슬리는 권력기관은 그나마 검찰이 유일했다. 검찰까지 손아귀에 넣었으니 권위주의적인 박근혜 정권의 실질적인 출범은 이제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국정원, 검찰, 경찰, 감사원 등 모든 권력기관을 완전히 장악한다고 국정 운영이 순조롭게 이뤄질까. 박정희 유신독재 체제가 어떻게 종말을 맞았는지를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유신독재 때는 사실상 종신 대통령에다 고문이나 폭행·투옥 등 물리적인 폭력을 맘껏 쓸 수도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그런 유신독재도 박정희가 수하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도 한참 달라졌다. 박정희식 통치로 다스려질 대한민국이 이미 아니다.
박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국정 운영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는 화사한 미소와 아전인수식 미사여구 몇 마디로 될 일이 아니다.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대로 각 정부기관에 권한과 책임을 넘겨주고 자율적이고 실질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중립성과 독립성이 생명인 감사원과 검찰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권력기관만 완전히 장악하면 마음대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만이다. 오히려 ‘아버지의 비극’을 다시 초래할 독이 될 수 있다.
채 총장 축출은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이 박 대통령의 아킬레스건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18대 대선의 공정성 여부와 직결된 사안이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사건은 최근 점차 그 핵심이 드러나는 중이었다. 국정원 대선 개입 재판이 진행되면서 국정원과 경찰, 그리고 새누리당과의 연결고리가 추가로 밝혀진 것이다. 검찰이 국정원 수사를 제법 꼼꼼하게 해놓은 덕분이다. 앞으로 더 직접적인 증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지난 18대 대선 불복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국정원 대선 개입 증거들이 공개되는 걸 막아야 하는 시급한 과제가 박 정권 앞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청와대가 조급하게 무리수를 두어가며 검찰 총수 제거 작전에 나선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 정권의 앞날은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국정원 개혁도, 검찰의 독립성도, 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기대할 수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전모를 소상히 밝히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겠다는 쪽으로 박 대통령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답이 없다. 그런데도 어렵게 열린 ‘3자 회담’에서 아무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만 되풀이 주장한 것은 유감이다.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박 대통령이나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 한겨레신문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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