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이명박 정부 아래서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여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약화시키자 239명의 북미 학자들이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에 경종을 울리는 시국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지금, 또다시 205명의 북미와 유럽 학자들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국가정보원을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9월18일치로 발표하였다.
사회적 쟁점이 생길 때마다 집단적인 시국선언을 하고 공동행동에 나서는 것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있어서 나는 서명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 편이다. 촛불문화제라든가, 유모차를 밀고 나온 주부들의 발랄한 저항, 중고생들도 함께 하는 인터넷 캠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를 바로잡는 일도, 새로운 변화를 위한 운동도 이제는 좀더 참신하게, 좀더 느긋하게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의 대선공작과 부당한 정치개입으로 초래된 민주주의의 위기는 많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는 것 같다.
지난여름 내내 수천명에 이르는 국내외 학자와 교수들을 비롯해, 종교인, 지식인들이 시국선언을 하였고 무수한 사람들이 촛불을 들어 국정원의 개혁과, 법원·검찰의 중립을 요구하였다.
반면 국정원은 대선개입 논란 와중에 도리어 엔엘엘(NLL) 대화록 요약본을 배포하여 쟁점을 돌리려 했고, 채동욱 검찰총장은 혼외자 추정 언론 보도와 법무부의 감찰 압박으로 사퇴를 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공안의 고삐를 죄며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었고, 민주 발전과 함께 건강한 변화를 추구해 온 법원마저 한명숙 전 총리의 무죄 판결을 번복하여 2년 실형을 선고하니, “이것은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 같다.
이번에 서명한 외국 교수 및 학자들 중에는 19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꾸준히 발언해온 브루스 커밍스 교수와 에드워드 베이커 하버드 옌칭연구소 부소장의 이름이 보인다. 단 베이커는 광주 평화봉사단 활동 중 한국말을 배워서 지금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한국 역사학 교수다.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미국 68세대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질타하는 대표적 지식인이며, 박노자 교수는 청년 같은 열정으로 한국의 진보정신을 일깨운다. 한국의 중산층을 연구해온 구해근 교수, 한국 노동문제 전문가 제이미 두셋 교수, 제니퍼 전, 주디 한, 그리고 서재정 교수 등 진심으로 한국을 걱정하는 이들이 한마음으로 국정원의 개혁과 민주주의의 회복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결국 이 시국선언에 동참하기로 했다.
사실 한국의 민주화와 진보 운동은 추상적 이념보다 먼저 동시대를 사는 이들의 아픔을 덜기 위해 자신부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정의에 대한 의무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손해가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하려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희망이었다. 한국을 사랑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꾸짖음을 정부가 가벼이 여기지 않길 바란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 국정원의 잘못된 행동을 방치하면 안 된다. 검사들이 권력의 입김에 휘둘리거나, 대한민국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정치의 눈치를 보게 하면 안 된다.
시국선언에 서명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안타깝다. 독재의 시대에는 바위에 맨몸을 부딪치듯 절망적 투쟁이 필요했지만, 민주주의는 국민이 굳이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정부와 관청이 나서서 국민의 의사를 추스르는 사회여야 한다. 추석 연휴에도 노숙투쟁을 하는 야당, 13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쌍용차 노동자, 그리고 새로운 정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외침. 이 아우성들이 불통의 벽에 막히지 않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여는 다른 길은 없을까.
< 백태웅 - 하와이대 로스쿨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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