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끝난 독일 총선 과정에서 최대 화제는 ‘손’이었다.
집권 기민당이 두 손만 클로즈업한 70m×20m짜리 ‘기괴한’ 대형 선거포스터를 베를린 중앙역 청사에 내건 것이다. ‘독일의 미래가 달린 선한 손’이라는 글귀만 아주 작게 달렸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손 모양”이라 불리는 이른바 ‘메르켈-마름모’ 사진이다. 유심히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항상 배 앞에서 두 손을 아래쪽으로 겸손히 모아 마름모 모양을 만드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손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손짓’만으로 3선을 확정지으며 세계 최장 여성 총리 자리를 예약한 메르켈은 누구인가.
메르켈은 세계 정치무대에서 ‘수수께끼’로 불린다. 누구는 무명의 동독 출신 여성 물리학자가 일약 국제적 지도자가 된 것은 헬무트 콜의 발탁과, 독일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유로 위기라는 상황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외부 조건만으로 메르켈을 다 설명할 순 없다.
보수주의자 메르켈의 힘은 ‘실용주의’에서 나온다. 대표적인 게 원전 정책이다. 그는 집권 뒤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이 정해놓은 노후 원전 폐기 시기를 더 뒤로 미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진 뒤 전격적으로 탈원전을 결정했다. 물리학 박사 출신이자 환경 및 원전안전 장관을 몇년씩 했던 원전 신봉자였기에 이런 전환은 더 극적으로 비쳤다.
여성 정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연합 차원의 기업 CEO 여성 쿼터제 도입에 반대한 것 등을 이유로 그는 ‘반여성적’이라는 비난에 내내 시달렸다. 그런데 지난해엔 독일 기업들을 향해 “여성 쿼터 증가에 자발적 움직임을 기대했지만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있다”며 법제화 가능성까지 시사하며 매섭게 경고했다.
전업주부 대상의 ‘어머니 연금제’가 여성의 사회진출을 저하시키는 보수적 정책이라는 지적이 일자 3살 이하 탁아소의 전면확대 같은 대안도 동시에 내놓았다.
이런 그에겐 ‘신념이나 비전이 없는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합의가 형성될 때까지 논쟁이 무르익기를 기다리고, 미리 정답을 정하지 않고 여러 대안을 모색해놓는 신중한 스타일은 그를 차츰 “이데올로그가 아닌 문제해결사”로 불리게 했다.
“메르켈은 독일 정치의 핵심이 합의와 연합 구축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 자신이 지키지 못할 정책을 그가 쉽게 뱉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야당은 언제든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기계적으로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파이낸셜 타임스>)
지난해 12월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한겨레신문사에 들렀던 일이 떠오른다. 편집국을 돌다 마침 내 자리에 놓여 있던 책 제목을 본 그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 여성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달라진답디까?” <왜, 여성대통령인가?>라는 그 책의 상당부분은 메르켈 총리 얘기였다.
그 책을 이후 박 대통령이 읽었는지 확인한 바는 없지만, 책 없이도 박 대통령 본인은 메르켈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 같다. 이달 초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는 두 사람이 반갑게 악수하는 사진이 보도됐다. 2000년 각각 야당이던 시절 만나 친분을 유지한 이래 벌써 네번째 만남이란다.
자국의 첫 여성 지도자이면서 이공계 전공자, 보수 야당을 집권당으로 올려놓았다는 점 등 공통점이 적잖은 두 사람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메르켈의 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 <USA투데이>는 메르켈을 두고 “도그마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보수정치인이 어떻게 사회를 분열시키지 않고 이끌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고 말했다.
< 한겨레신문 김영희 문화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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