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경제위기가 지구촌 전체로 확산된 지난 6년 동안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집권 정당이 바뀌었다. 위기의 구조적 요인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점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기도 한 현상이다. 그 와중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기민당의 의석수를 크게 늘리며 3선에 성공했다. 경제가 다른 나라보다 순항하는 이유가 크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한마디로 ‘엄마 리더십’으로 불리는 중도적 실용주의의 승리다. ‘유연성, 포용, 신중함’이 그를 수식하는 수사다. ‘뉴라이트’나 ‘네오콘’과는 구별되는 ‘통합형 보수’다.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켈과 가깝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 이외에 공통점이 거의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유연성 대신 대결, 포용 대신 위계(또는 지배), 신중함 대신 밀어붙이기(본인은 ‘원칙’이라고 할 것이다)를 앞세운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불과 취임 7개월 만에 자신의 복지 공약 가운데 핵심인 기초연금, 4대 중증질환, 무상보육 등의 사안에서 공약 파기를 공식화하고 있다. 여기에 사회적 차원의 진지한 토론도, 야당과의 타협도 없다. 정부가 해직자의 조합원 가입을 이유로 전교조의 노조설립 취소 수순에 들어간 것은 노동 문제에서도 대결 기조로 가겠다는 선언이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역사전쟁’을 사실상 주도하는 사람도 박 대통령이다. ‘역사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 불을 지폈던 그는 뉴라이트 성향의 부실 교과서가 큰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이 교과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새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대결과 지배의 무대가 역사관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불법 대선 개입 사실이 속속들이 드러났는데도 사과와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야당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민주당이 서울시청 앞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고 54일 동안 장외투쟁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당의 요구 내용은 박 대통령에게 ‘부탁’하는 수준의 온건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야당이 자신의 정통성과 권위에 부당하게 도전하는 것처럼 야당의 굴복을 요구해 왔다.
 
남북 관계도 다시 기약 없는 냉각기에 들어갔다. 현상적으로는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을 북쪽이 일방적으로 연기시킨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면에는 대결과 지배를 추구하는 정책기조가 깔려 있다. 새누리당 소속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엊그제 “최근 개성공단 가동 재개 협상에서 7차 회담까지 진행된 끝에 북한이 재발 방지에 합의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굴욕에 가까운 것이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취임 뒤 소신 있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지금은 주도권이 한국에 있다”고 했다. 북쪽이 남쪽의 ‘하위 주체’임을 분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북 관계도,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이런 태도는 정부 안에서 일반적이다.
재벌과의 관계에서는 위계가 정반대다. 재벌들이 집요한 로비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경제민주화 공약들이 후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대통령이 직접 재벌 총수들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투자를 ‘구걸’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8월 초 청와대 개편을 전후해 여권 안 수직적 위계질서 구축을 끝내고 이제는 이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려 한다. 앞서 이명박 정권은 ‘한국 사회 전체의 시장화’를 추구했으나 거센 역풍을 맞았다. 현 정권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의 굴복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권보다 더 폭력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시대에 형성된 보수 본류의 본색이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메르켈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폐기를 선언해 녹색당 바람을 가라앉혔고, 22일 치러진 총선에서는 가정복지 정책 강화와 징병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어 사민당의 표를 가져갔다. 박근혜 정권은 이와 반대로 낡은 보수의 본색을 강화해 나간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당분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큰 대결과 갈등을 불러 부러지거나 내파할 가능성이 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생한 사례다.
< 김지석 -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