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홍범도 장군 묘소 앞에서

● 칼럼 2013. 11. 10. 18:07 Posted by SisaHan
비행기로 7시간을 날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25일 오전이었다.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이종찬)는 장군의 서거 7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현지에서 추모식을 열고 학술회의를 열었다. 현지 동포와 유지들이 다수 참석하고 저녁에는 동포들이 출연한 연극 <홍범도>가 공연되었다. 연극은 서거 한해 전에 공연되어 홍 장군이 직접 관람해 자신을 너무 추어올리지 말라고 당부한 지 71년 만에 재공연되었다.
이튿날 일행은 국내선으로 90분 거리인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의 빛바래고 초라한 묘소를 찾았다. 현지 고려인(조선인) 여성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장군의 묘소에 빨간 장미꽃을 바쳤다. 장군의 넋을 위로하는 헌화와 헌주에 이어 나는 70주기에 맞춰 출간한 졸저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을 헌정하였다. 황량한 벌판에 자리한 묘역은 잿빛 하늘에서 금방 비라도 쏟아질 듯 을씨년스러웠다.
 
홍범도. 머슴 출신으로 일제의 침략에 분연히 일어나 산포수의병으로 시작해 청산리대첩을 비롯하여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서 일제와 줄기차게 싸웠던 빨치산 대장. 일제강점기 무장투쟁으로 30여년을 일관한 항일투사는 그가 유일하다. 그 과정에서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고 차남은 전투중에 병사하였다. 해서 혈육 한점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조국 해방에 바쳤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 부를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수십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의 승리에는 그의 공이 가장 컸다는 것이 연구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범석 장군이 자신이 속한 부대를 띄워 올리고 홍 장군을 폄하하면서 공적이 엉뚱한 사람한테 넘어갔다.
홍범도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계급투쟁이 아닌 민족해방투쟁에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였다. 그것도 ‘무장투쟁’이라는 가장 힘들고 위험 부담이 높은 투쟁에 헌신한 빨치산 대장이었다. 이들의 존재로 독립운동이 문약에 빠지지 않았고, 한민족의 당당한 패기를 지키게 되었다.
 
국가(왕조)의 온갖 혜택을 입었던 왕족, 대신, 고위 관료들이 친일파가 되어 민족을 배신할 때, 그는 산포수가 되고 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고 빨치산 대장이 되어 일제와 싸웠다. 그리고 1936년 스탈린에 쫓겨 머나먼 카자흐스탄까지 밀려갔다. 그곳에서 극장 수위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43년 10월25일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75살을 일기로 숨졌다.
독립운동가인데도 아직까지 유해 봉환도 논의되지 않고, 교과서는 친일파들로 채워지는 시대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이 가족과 생명을 내걸고 일제와 싸울 때 친일의 대가로 자식을 건사했던 자들이 자자손손 출세하고 호강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친일 후손들만 보호할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되는가. 국가보훈처장은 권력에만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망각되어가는 항일투사들에게, 국사편찬위원장은 ‘독립운동을 훼방한’ 이승만에게만 넋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에게 정신을 모으기 바란다.
일각에서는 홍범도가 레닌에게서 권총 등을 선물받은 것을 두고 ‘좌파 독립운동가’로 낙인하고 그의 공적을 비하한다. 이분들께 말한다. 일제강점기 좌우 이념 노선과 오늘의 북한 체제를 동일시하지 말 것을. 아울러 독립운동가보다 친일 경력자를 ‘건국의 아버지’ ‘부국의 아버지’ 따위로 추어올리는 몰역사·반역사의 곡필을 중단할 것을 바란다.
홍 장군의 묘역을 떠날 즈음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잘 가라는 이별의 눈물이었을까, 고국의 못난 후손들을 질책하는 눈물이었을까.
< 김삼웅 - 전 독립기념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