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전체주의적 색깔이 농후한 ‘조직’만이 있고 ‘양심’이 거의 불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 것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에서 ‘한국 종교와 철학’을 12년째 가르치며 자신의 이름도 아예 한국식으로 고친 한국통 학자인 박노자(Vladimir Tikhonov) 교수가 한국정부의 ‘전교조’ 불법(법외노조)화 선언을 비판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교직사회에서 전교조가 ‘양심’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전교조 교사들은 고질적인 사학 비리에 맞서왔고, 또 촌지와 같은 악질적 관행의 근절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바른 것을 교육하려 노력하는 등 학원의 정의를 바로 세우고, 학생들에게 양심을 가르치는데 힘써왔다고 했다. 그런데 이들 단체를 법 밖으로 내모는 것은 국제노동기구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양심에 따른 행동을 제재함은 물론 동료를 배신하고 학생들에게는 양심을 가르치지 말라는 탄압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의 말대로 한국은 이제 양심이 불가능한 사회로 급속히 달려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양심을 지키며 핍박을 받느냐, 아니면 양심이니 정의니 하는 고상한 단어는 접어두고 당장의 안락한 삶을 위해 조직외압에 타협해 버리느냐는 고민의 기로에서 번민해야 하는 사람들이 단지 교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 행사에 겹겹이 에워싸여 양심의 갈등을 겪는 소시민, 소직업인들이 어디 한 둘이겠는가. “에라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잠시 마음이 불편해도 무사히 살 것이라는 편안함의 유혹은 대다수의 삶을 옭아맬 수밖에 없다.
거대한 정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단초가 된 댓글수사로 영-욕(榮辱)의 격랑에 휩쓸렸던 권은희 수사과장은 경찰관 신분으로 양심이냐 정의냐, 눈감고 굴종이냐의 기로에 섰을 근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경찰조직이라는 유무형의 압박 속에서도 결연한 선택을 했다. 불법을 덮는 거대권력에의 순응이 정의가 아닌 이상 양심에 어긋난 행동은 안된다는 ‘행동하는 양심’을 실천했다. 검찰은 물론 청와대와 국정원을 포함해 더 큰 권력의 압박에 대항한 소신수사로 역시 영욕의 희비를 겪은 윤석렬 검사 또한 수사법관의 양심으로 조직의 부정의(不正義)를 고발했다.
당사자들의 육성고백은 없어도 그들이 얼마나 심한 고충과 심적 갈등에 시달렸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조직과 권력의 생리를 모를 리 없고, 조직논리를 거스른 자가 걸어야 할 길이 가시밭길임은 수많은 권력의 희생자들이 앞서 걸으며 입증했기에 그렇다.
‘양심선언’의 시대와도 같았던 90년대, 재벌들의 비위와 감사원의 은폐를 폭로한 이문옥 감사관, 그는 양심을 지킨 죄로 ‘국가기밀 누설죄’ 라는 엉뚱한 죄목으로 구속되는 신세가 됐다.
국군보안사가 사찰한 야당 정치인들을 포함해 재야, 종교계 인사 등 1300여명의 개인 정보와 기록을 담은 디스크를 들고 탈영한 윤석양 이병은 군과 동료들의 질시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92년 군 부재자 공개투표 등 군내 부정선거를 고발한 이지문 중위도 불명예제대에 취업이 막히는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조차 무차별 도감청을 폭로하고 최근 러시아로 임시 망명한 에드워드 스노든을 비롯해, 이라크전 기밀문서로 전쟁의 무모성에 경종을 울린 브래들리 매닝 일병 등 내부의 양심적인 고발자들은 똑같이 험한 수난을 당하고 있다.
부정과 부패의 고리 단절과 사회정의를 깨우치는 지대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 흔한 공로상 한번 주었다는 이야기도 못듣는다. 한낱 ‘용기있는 비양심 사회의 희생자’들로만 기억되는 비정하고 불의·부도덕한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용감한 양심의 사람들이 대우 받기는커녕 ‘배신자’로 손가락질을 받는 세태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양심적 선언과 행동들은 비정상적이고 후진적인 상황, 정의롭지 못한 정치현실에서 이뤄진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는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나오지 않는 게 상식이다.
정의와 도덕률, 심지어 진리마저 ‘내게는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으로 아전인수 적용과 이기적인 강요로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더럽히는 권력의 행패. 화려하게 포장된 민주주의 문명국 뒤안길의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 묵살과 추잡한 전체주의적 양태들이 빚어내는 양심과 도덕의 실종 현상들이다.
어려서부터 “정의롭게 양심적으로 살라”고 가르치기 보다는 “일류대에 들어가라,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돈 많이 벌어라”라는 교육이 자리잡은 지금, 어느 것이 정의이고 양심적인 것인지 ‘정의와 양심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는 세상이니, 갈수록 양심행동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정의를 향한 양심의 고독한 싸움은 소중하고 위대하며, 마땅히 대우받아야 한다. 한 마리 제비가 봄소식을 알리듯, 긴긴 겨울에도 어김없이 희망의 전령이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와 정의의 생명력을 기억하며-.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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