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대학생들이 매우 온순해졌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가 그렇다. 사춘기를 거치지 않은 것 같아서 물어보면 초등학교 5학년 때 “잠시 거쳤다”고 한다. 중3 아들을 둔 제자가 “요즘 애들은 사춘기도 안 거치나요?”라고 물어온 적이 있다. 그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맨이다. 그때 나는 답했다. “부잣집 아이들은 안 해. 강아지처럼 잘 따르지.” 또 다른 제자는 자기만 아는 남편에 질려서 이혼을 하려고 아이에게 의논을 했더니, 놀란 기색도 없이 아이가 곧바로 지금 사는 집에 누가 살 것인지만 알고 싶어 하더라고 했다. 자기만 아는 아이를 보고 기가 막혀버린 그는 지금 남편과 계속 살고 있다. 누군가의 표적이 될까 봐 조신하고, 적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늘 유순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생존’과 ‘안전’에 대한 강박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누가 날 낳으랬어요?”라며 부모에게 대들던 90년대 학번 형이나 언니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최근 <속물과 잉여>라는 제목의 책이 나왔는데 그 책에서 백욱인 교수는 “애비는 속물이 됐고 그 자식들은 잉여의 나락에” 빠졌다고 말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들은 노크도 없이 방문을 덜컥덜컥 여는 부모가 참을 수 없어 부모에게 반항하고 또래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은 부모의 속물성에 편승한다. 운동은 자기들이 대학 때 다 했으니 너희는 공부만 하라는 아버지의 이중성에 놀라지만 그에게 순종하기로 했고, 중학교 때 록 공연에 데려가 준 ‘쿨’한 부모의 ‘관리’가 고맙다며 그들의 기에 눌려 산다. 이들의 삶의 목표는 안정된 직장을 얻고, 제때에 결혼하고 탈 없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 구조로 보면 그들은 잉여적 존재가 될 확률이 아주 높다.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니트의 날’ 행사에서, 서른살이 가까워진 은둔형 외톨이는 대학 졸업 뒤 겨우 직장을 얻었지만 힘들어 퇴사한 뒤에는 집에 틀어박혀 산다고 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잘 버텨내서 지금은 꽤 편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다. 부모의 연금에 빌붙어 사는 이 친구에게 짓궂은 평론가가 물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려고? 자살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는 그렇게 되면 자살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어떻게 자살할 것인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청년의 모습은 일본에서나 가능한 것일까?
‘핫’한 운동권 부모와 ‘쿨’한 신세대 부모들은 자기 방식의 사랑과 투자로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들을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것 같다. 당신은 그럴 만한 경제력과 널브러져 있는 성인 자녀를 보아낼 충분한 덕성을 쌓아놓았는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그들의 자활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핫’한 운동권 부모와 ‘쿨’한 신세대 부모들은 자기 방식의 사랑과 투자로 자녀들을 열심히 키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들을 평생 먹여 살려야 할 것 같다. 당신은 그럴 만한 경제력과 널브러져 있는 성인 자녀를 보아낼 충분한 덕성을 쌓아놓았는가? 아니라면 지금부터 그들의 자활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주말 서울의 한 청소년 센터에서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전환과 연대’라는 주제로 청소년 축제가 열렸다. 그 행사에서 청소년들은 폐자전거로 멋진 자전거를 조립하고, 버려진 목재로 의자를 만들며, 태양광 음식물쓰레기 건조기를 제작했다. 퇴비 만드는 법을 배우고 손작업 워크숍에서 소품들을 만들고 요리를 해서 임시 장터에서 팔기도 했다. 노동하는 몸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자리, 그리고 함께하는 즐거움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아이를 평생 먹여 살릴 자신이 없는 부모들은 슬슬 동네에 작업장을 만들고 작업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동네 빈터에 펼쳐둘 평상을 만드는 목공방이나 자전거 공방을 협동조합으로 차려도 좋을 것이다. 청소년들이 자신이 만든 자전거로 동네 심부름도 다니고, 직접 만든 소품을 구청 열린 장터에서 팔고, 동네 어른들과 친해진다면 이들도 자신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어른들은 아이를 좀비로 만드는 제도 교육을 바꾸어내면서 동시에 새 일거리들을 만들어내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새 일거리란 실종된 ‘상호 돌봄의 사회’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지속가능한 삶을 가능케 할 산업, 곧 에너지와 물, 농사와 집짓기 등과 관련된 적정기술 분야가 아닐까 싶다.
< 조한혜정 - 연세대 교수, 문화인류학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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