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쉬멜로 실험이란 것이 있다. 마쉬멜로는 서양 아이들이 캠핑을 가서 모닥불에 구워 먹기를 좋아하는 것인데 스탠포드 대학의 월터 미셀이란 학자가 마쉬멜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며 “지금 먹어도 좋으나 15분만 참으면 하나를 더 줄게.”하고 실험을 했다. 15년이 지난 뒤 그 아이들을 조사한 결과 15분이 흐른 뒤 마쉬멜로를 하나 더 얻은 아이들의 성적이 800점 만점에 평균 125점 이상 더 높았다는 것이다.
2014년을 맞이하면서 나는 공교롭게도 14년이란 숫자가 마음에 들었다. 몇 년 전부터 수요일 저녁에 고린도 후서를 강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12장으로 들어가는 날이 바로 14년도에 처음 맞는 수요일이었다. 그런데 이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셋째 하늘(3 층천)에 다녀온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는 그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고 그 체험도 14년이 지난 뒤 밝히고 있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이 체험을 말할 때는 이유가 있었다. 고린도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 같은 교회들이 그가 예수님에게서 직접 불림을 받지 않았다며 사도임을 거부할 때 자신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불림을 받은 자이고 자신 역시 다른 사도와 비교할 때 결코 모자람이 없는 자라고 당당하게 말했으니 곧 그가 당한 고난과 자신에게 주신 영적 체험이 남달랐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신중했다. 첫째는 자신이 가 본 천국에 대해 결코 그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여러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의 신앙적인 지도를 하는 입장에서 그 내용이 필요했다면 능히 내가 본 천국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천국은 오직 우리의 소망으로 본향을 그리는 신앙의 길에 유익한 것이지 결코 염세 사상과 함께 천국만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됨을 보인다.
둘째 그는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일절 언급을 않고 있다가 14년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만일 그런 체험을 가졌다면 입이 간지럽고 자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간증 집회도 가졌지 않았겠는가? 현대에도 그런 사람이 많으니 말이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불문에 붙이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혜는 함부로 이야기하고 떠벌리며 자신의 자랑으로 내세울 것이 아니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바울 사도의 그 신중한 자세를, 14년 뒤에 그 귀한 체험을 나타냈음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가 14년이 지난 뒤 밝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바울 자신에 대한 위로로 주심을 말하여 성도들에게 고난 뒤에 나타나는 위로와 영광을 말하고자 함이나 그런 언급마저도 부득이하여 할 수밖에 없음을 소개할 뿐이지 결코 자랑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귀한 간증 체험이지만 14년 뒤에 언급한 것을 보면서 우리 역시 신앙생활하는 동안 개인적인 좋은 체험이나 교회를 향한 훌륭한 봉사와 섬김, 대단한 수고나 헌신들이 있다 해도 지금 당장 자랑으로 말하지 말고 14년이 지난 뒤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설혹 14년 뒤에 말할 수 없어도 주님을 향한 그 섬김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 또한 무슨 원망이나 불평을 늘어놓고 싶다 해도 14년쯤 기다리면 어떨까?
당장에 터뜨리고 싶은 것이 있다 해도 마쉬멜로처럼 기다려 보자. 만사를 14년 뒤에 하면 얼마나 좋을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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