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기부터 성폭력을 큰 범죄로 규정하고 엄단할 뜻을 밝혔다. 하지만 말뿐인가 싶다. 지난해 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속 검사들과 출입기자단의 송년회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
지난달 대검찰청 감찰본부는 술자리에서 여기자들을 성추행한 이진한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장(전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에 대해 ‘감찰본부장 경고’ 처분을 내렸다. 정식 징계에 해당하지도 않는 솜방망이 처분이라며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지난 6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노골적으로 이 지청장을 감싸고돌았다. 비슷한 사건으로 무거운 징계를 받았던 검사와 왜 처분이 다르냐고 묻자, 황 장관은 “우리 이 차장”이라고 언급한 뒤 “모든 상황을 종합 판단해 징계양정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말하는 ‘우리’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검찰의 성 인식은 무척 낙후돼 있다. 2010년 이후 지난해까지 부적절한 언행으로 견책, 면직, 감봉, 정직을 받았다고 공개된 검사만 5명이다. 술김이란 핑계로 공적인 관계를 무시한 채 검사, 기자, 변호사를 ‘여자’, ‘몸’으로 대상화했다. 입 맞춰달라 하고, 블루스 추자고 하고, 신체를 어루만졌다. 하지만 비슷하게 소름 끼치는 일을 겪은 피해자들은 혼자 끌탕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알려진 사건은 빙산의 일각인 셈이다. 그나마 대등한 관계라는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이 이럴진대, 일반 국민한테는 오죽할까. 잊을 만하면 터지는 검사 성추문 사건뿐만 아니라, 여성단체들이 해마다 선정하는 ‘여성인권 걸림돌’에도 검사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을 연애로 둔갑시키거나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고, 고소인의 개인정보를 재판정에서 공개하는 등 비슷한 문제가 개선 없이 반복된다. 내부에 성희롱 예방지침도 있고, 교육도 하지만 학습 효과가 없다. 이런 가운데 터져나온 이번 성추행 사건을 보면, 검찰이 각종 성폭력 사건을 공평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다. 2012년 3월 회식 자리에서 여기자 등에게 부적절한 언행을 한 검사는 정직 3개월 처분에 사표까지 냈다. 황 장관은 “사건마다 정도나 양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검사들 내부에서조차 “징계를 받지 않을 정도인 부적절한 신체 접촉과 강제추행에 해당하는 부적절한 신체 접촉의 경계가 무엇인지” 묻는 일갈이 터져나온다.
정답은 황 장관이 말한 “우리”의 경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권력자가 친밀한 관계로서 “우리”를 강조하면, 나머지는 배제되고 만다.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은 줄줄이 좌천됐지만, 사건 축소를 주장하고 ‘살아있는 권력’에 충성한 공안 검사는 성추행을 한 뒤에도 징계 없이 좋은 자리로 갔다. ‘국정원 댓글 직원’은 ‘여성 인권 침해’를 들먹이며 보호해준 반면, 댓글 수사 외압을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은 승진에서 탈락시켰다.
정말 우려되는 건, 권력이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알아서 협조하라는 간접명령을 온 사회에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눈 밖에 나면 개인의 안온한 삶은 언제든 배척당하고 승인이 취소될 수 있다는 대사회적 경고, 아니 협박성 메시지다. 이쯤 되면 배제된 사람들이 모여 ‘감시 크라우드소싱’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지청장을 비롯한 문제적 인물들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정보를 한데 모으는 것이다. 배제의 범위는 갈수록 넓어질 것이고, ‘그들의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가진 눈과 귀와 입은 점점 더 많아질 테니까 자료가 부족할 걱정은 없겠다.
< 이유진 -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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