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나 추석같은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릴 때 추억이 아련하게 밀려오기 때문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온 동네가 왠지 들뜨고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어른들이 읍내에 장을 보러 가 평소 구경하기 힘든 조기와 갈치같은 생선꾸러미를 하나 둘씩 싸들고 온다. 없는 살림에 양말과 신발, 옷가지 등 설빔도 장만해오면 아이들은 벌써 설맞이 세배준비로 설렌다. 동네 이장 집 앞에는 틈실한 돼지 두 마리가 네 다리를 묶인 채 ‘종말’을 예감한 듯 꿀~꿀~ 신음을 내며 나뒹굴고 있다. 마침내 건장한 일꾼들 몇이 돼지를 붙잡고 예리하게 숫돌에 간 칼로 목에 구멍을 내면 그야말로 멱따는 소리와 함께 꽐꽐 쏟아지는 선지를 벌꺽벌꺽 들이마시는 징그러운 광경…. 어른들 다리사이로 얼굴을 들이밀고 흥미 최고조로 쳐다보던 아이들은 그만 놀란 토끼눈이 되고 만다.
뭉턱뭉턱 인심좋게 잘라 낸 돼지고기는 집집마다 나뉘어 설날 아침 든든하게 밥상을 장식한다. 왁자지껄 이웃 아낙들이 함께 모여 지지고 볶고 메친, 전이며 한과와 떡이 집집마다 그득하니 일년 중 제일 먹거리가 풍성해질 때다. 때때옷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차려입은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이집 저집 어르신들에게 훈계와 함께 받은 세배 돈을 꼬낏꼬깃 호주머니에 모아 넣고는 “내가 더 많다“ ”아니야 내가 더~” 서로 질세라 자랑하며 기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농악단의 꽹과리 소리와 제기차기 널뛰기로 소란스런 동네 앞마당, 골목을 떠도는 구수한 음식 냄새, 웃음과 정이 오가는 사람 냄새…, 하루 해가 어떻게 지는지 몰랐던 우리네 시골의 설날-.
구정에 즈음해 오랜만에 고국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잠시 찾아 뵈려니, 그 옛날 설맞이 세시풍속이 눈물겹도록 그리워진다.
세상이 너무 세련됐고 모든 게 기계화, 디지털화한 지금도 그렇게 시골스러우면서 인정 넘치고 푸짐한 고향 설날의 풍정을 찾아볼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깊은 산골마을에도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버려 그 토속적인 설 풍속은 찾기 힘들지 않을까. 아마 부모찾아 설 쇠러 오는 자식들을 손꼽아 기다리는 촌로들의 체념과 한적함이 두드러지지 않은지, 불효의 큰 죄책감 속에 얼추 짐작해 볼 뿐이다.
우리 전통 세시풍속에는 공동체의 유대와 인정이 넘쳐났다. 온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명절을 즐기며 화합을 다지고 서로 북돋우며 내일을 위한 힘을 결집하기도 했다.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미풍양속이란 거기서 연유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명절은 온통 교통체증으로 도로에 정력을 쏟고, 부모와 고향을 찾아 용돈드리고 폼내고 가면 그만 인 세상이 됐다는 한탄도 들린다. 그러니 시골민속에서 보고 익히는 정감과 상생부조(相生扶助)의 전통과 미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이 갈수록 갈라지고 삭막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민사회에서 전통명절은 더욱 멀어져간다. 양로원과 일부 교회에서 어른들에게 세배하고 선물드리는 정도로, 또 향우회원들이 한데 모여 저녁 한끼 먹고 즐기는 것으로 설의 명맥이 유지되는 듯 싶다.
8년 전인 2006년 1월5일에 나온 시사 한겨레 창간호 1면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가족의 다복한 모습이 독자들의 눈길을 모았다. 지난 2008년 작고한 토론토의 고 이천욱 옹 집안 식구들이 새해를 맞아 3대가 오붓하게 한자리에 어울린 아름답고 정겨운 사진이었다. 이들 가족은 새해 첫날 아침 세 자녀의 손자들까지 온 식구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세배를 드리고 훈훈한 가족애를 나눴다. 할아버지가 세 아들과 손자들에게 한 해를 꿋꿋하게 살아가라는 덕담을 건네자 자녀들은 내외의 건강 장수를 기원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겨 재롱을 부리고, 식구들은 며느리들이 장만한 음식과 함께 이야기 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듯 했다. 신년 설이긴 했지만, 이민의 삶에서 흔치않은 우리 전통 세시(歲時)의 설을 쇠는(過歲)모습이어서 좋았던 기억이 새롭다.
한인 경제마저 침체 일로여서 자꾸만 위축되어 가는 동포사회와 가정마다에, 우리 고유의 방식과 풍습을 재현하고 구수한 인정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모으는 설맞이·추석맞이 행사가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디아스포라의 삶이기에 더더욱 집집마다, 또 우리 한인 커뮤니티에서 온가족이 모여 사랑을 나누고 함께 어울려 서로서로 용기를 북돋우는, 그렇게 피부에 와닿는 넉넉한 화합의 민족 전통으로 말이다.
< 김종천 발행인 겸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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