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노모(老母)의 깊은 뜻은

● 칼럼 2014. 3. 4. 13:39 Posted by SisaHan
한밤에 하릴없이 집안을 맴돕니다. ‘정신이 멀쩡한 엄마를 요양원에 보낸다.’ 고. 막내 동생의 울음 섞인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혀서 편치 않은 하루를 보낸 끝입니다. 이런 밤은 차라리 어둠이 편할 것 같아 실내등을 끄니 전나무 숲 그림자가 마루 깊숙이 들어와 앉았었군요. 현란한 전등불 아래 감춰졌던 초롱초롱한 달빛이 발길을 창으로 이끌어갑니다. 
쭉쭉 뻗은 전나무 숲 끝에 이제 막 솟아오른 보름달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군요.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들어 와 쇤다.’는 정월 대 보름달을 우러르니 고향, 고향집, 그리고 연로하신 어머니가 그대로 떠오릅니다. 
근데 웬일인가요. 고향집 문설주가 파르르 떨리며 고향도 어머니도 휘청거려 보입니다. 모두 떠난 빈 둥지를 외롭게 지키시던 어머니, 기력이 쇠하여 이젠 더 버틸 재간이 없다고 하십니다. 항상 뒷모습만 보였던 못난 자식은 어머니가 안 계실 고향, 고향집이 여간 당혹스럽지 않습니다.
 
연로한 어머니의 마지막 거처를 위해 고국의 오남매는 연일 머리를 맞대었나 봅니다. 합리적인 사고의 아들들은 최신의 의료시설을 갖춘 요양원에 모실 것을 고집하고 비합리적인 딸들은 부족하지만 자식들이 모셔야 한다는 의견이었지요.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허물거리는 감성 사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어머니의 노환은 요통, 허리통, 관절통 할 것 없이 깊어져 갔고요. 보다 못한 어머니는 아들들의 손을 들어주었다는군요. 
자손들의 화합을 위해서라면 아무려면 어떠리, 하고 내리신 결정이었겠지요. 열외에 있는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곤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평생 자식들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육남매에 둘러싸여 울고 웃으며 보내고 싶다는 속내는 왜 감추셨는지요. 아니, 노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저희들이 모두 바보 멍텅구리입니다. 긴 세월동안 지극 정성으로 할머니를 모시던 당신의 모습을 보며 자란 우리들인데, 왜 그때의 영상은 끊어져 버린 걸까요. 인생을 통 털어 육친의 정이 가장 절실한 시기에 타인에 의한 어머니의 요양원 생활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한동안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던 옆집 서양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연로하여 의식불명 된 친정 부모님을 널싱 홈에 모셨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곧바로 아버지를 집으로 모셨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없는 부모지만 마지막 길을 타인에게 맡기는 게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분 돌아가시고서야 알게 되었답니다. 자신도 여러 가지 병을 달고 살면서 아버지의 숨이 멎는 날까지 이동식 침대를 뒤뜰로 향하게 하고 옆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읽으며 마음의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참으로 위대해 보였습니다.
어머니! 육신이 기울어진다하여 정신까지 놓으시면 안 됩니다. 셋째가 어머니의 곁을 지킬 때 까지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기억 떠올리기는 최고의 명약이랍니다.
 
어머니, 그때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날도 오늘처럼 정월 대보름 밤이었지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전, 동네 아이들과 보름맞이 놀이를 위해 뒷산으로 갔습니다. 온 동네를 돌며 모은 삭정이며 널빤지들을 얼기설기 맞대어놓고 성냥을 긋는 순간 치솟는 불꽃을 보며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지요. 하지만 전 동생들과 불꽃 유희에 열중해 있다가 아랫동네 아이들이 걸어오는 싸움 돌에 맞아 머리를 깨트리고 말았습니다.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감싸며 집으로 달려가던 때의 두려움과 어머니를 봤을 때의 안도감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였습니다. 어머니의 손길로 말끔해진 전, 달밤의 아름다움을 다시 알게 된 어린 시절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신이며 우주이신 어머니, 부디 쇠락의 길을 조금만 늦추십시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