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독일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통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조언했고, 이에 박 대통령은 “독일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모델”이라며 “통일 독일의 모습을 보면서 통일 한국의 비전을 세우겠다”고 화답했단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주문한 메르켈 총리의 충고는 평범한 듯하지만 사태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의 통일정책에서 가장 결여된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통일 독일’과 ‘분단 한반도’의 차이는 상호존중과 상호신뢰의 유무에 있다. 독일은 존중과 신뢰의 바탕 위에서 분단의 장벽을 허문 반면, 우리는 적대와 불신 속에서 분단의 성채를 쌓아왔다.
독일 통일의 길을 연 ‘동방정책’의 성공 비결은 무엇보다도 동독에 대한 섬세한 배려에 있었다.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최대한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용어 하나하나까지도 신경을 썼다. 브란트의 통일정책이 ‘동방정책’으로, 통일 담당 행정부서가 ‘내독성’(內獨省)으로 불린 까닭이다. 서독에 ‘흡수’될 것을 두려워하는 동독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통일’이라는 말 자체를 스스로 삼갔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통일문제에 있어 가장 전향적이고 유화적이던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마저 ‘햇볕정책’이었다. 이 말은 이미 북을 -물론 ‘삭풍’은 아니지만- ‘햇볕’으로 ‘벗겨야 할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은 그 천박함과 오만함이 도를 넘어섰다. 통일을 일확천금의 도박에 비유하는 반지성과 몰역사성은 차치하고라도, 상대방을 오직 경제적 약탈의 대상으로 얕잡아보는 오만함은 또 어찌할 것인가.
서독 정부의 통 큰 지원도 동서독 간 신뢰 구축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동독을 대하는 서독의 태도에는 맞수를 대하는 경쟁자라기보다는 아우를 대하는 형님의 너그러움과 여유가 있었다. 동독 마르크에 대한 신용 문제로 동독의 대서방 무역이 어려움에 처하자 스윙(Swing)이라는 무이자 장기차관을 제공한다거나, 재정 지원을 통해 동독 내 정치범들을 석방하도록 유도하는 등 서독은 동독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위해 선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독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퍼붓던 당시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3배 정도였지만, 오늘날 남북간의 경제적 격차는 대략 40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의 태도에서 형님다운 의연함은커녕, 최소한의 존중과 배려의 몸짓도 찾아보기 어렵다. 보이는 건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시대착오적 대결의식과 북의 위협을 과장하여 현실정치에 활용하려는 낡은 매카시즘의 욕망뿐이다.
통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있다. 우리의 상대는 불행히도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3대 세습의 봉건적 사회주의 전제국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해야 한다면 예의 옹졸한 적대적 자세부터 벗어던져야 한다. 북한은 이미 경쟁 상대가 아니라 포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 대박론’으로 어설프게 발톱을 드러내면서 입으로만 ‘평화통일’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경험에서 진정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의 경제력에 걸맞게 대북 지원과 경제협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망설일 것도 없다. 박근혜 정부는 이전의 어느 정부도 누리지 못한 이점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누구도 ‘퍼주기’라 비난하지 않을 테니까.
<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
<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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