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먼저 봄을 느끼는 곳은 옷가게나 패션 잡지의 화려해진 표지에서가 아니다. 목젖을 타고 내려간 독주가 저 깊은 곳에서 따뜻한 열을 전해주듯이, 에이는 듯한 바람의 한기 속에 뭔지 모를 은근한 설레임이 느껴질 때, 그 때 내 어딘가에 숨겨져 있던 촉이 봄을 감지한다. 완연해지지 않은 봄기운이 몸의 구석구석을 나른하게 할 때, 식품점 한켠에 나타난 작고 푸른 것들의 완강함이 나를 들뜨게 한다. 시골 장터의 큰 그릇이 아닌 식품점의 선반에 놓여있다는 것이 안쓰럽지만 덕분에 이 먼 곳까지 내 땅의 봄을 전해줄 수 있는 것이니 이건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금은 개별 포장해서 팔고 있지만 얼마전까진 원하는 만큼 구매할 수 있도록 큰 봉투에 담겨져 있었다. 나는 한참씩 식품점의 선반앞에 서서 한 움큼씩 봄을 집었다 놓으며 찬 기운안에 느껴지는 거칠고 쓴 겨울의 시간들로 내 봄바람을 달래곤 했다. 뿌리와 줄기와 잎마다 흙의 기운과 색을 단단히 장착한 이 진한 것들은 낮고 작고 억센 줄기와 향으로 우리를 당황케 한다. 미나리 ,달래, 냉이, 쑥, 봄동, 돌나물, 두릅 등.. 이름은 작고 봄바람처럼 귓가에서 살랑거리지만 척박과 혹독함을 생존 방식으로 택한 이 거칠고 검푸른 것들의 단호함은 식탁에서 우리의 여리 여리한 입맛과 생각을 기분좋게 두들겨준다.
봄나물과 함께 봄이면 떠오르는 작가가 있다. 김훈은 오랫동안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오십가까이 되어서 수필과 소설을 쓰기 시작한 작가다. 그가 신문기자 생활을 하던 시간은 한국 정치사의 수많은 사건 사고가 있었던 역동의 시간이었다.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그가 목격하고 견뎌내야 했던 시간들이 녹아 우리는 지금 봄나물처럼 싸한 그의 문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의 글들, 특히 수필을 읽을 때, 인위를 벗어난 원초, 원형의 모습은 감동이 아니라 입가에 잠깐 앉았다 가는 동감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었다. <자전거 여행>이라는 수필집에 남긴 봄나물에 관한 그의 생각을 읽으며 봄을 느껴보자.
‘…된장과 인간은 치정관계에 있다. 냉이된장국을 먹을 때, 된장 국물과 냉이 건더기와 인간은 삼각 치정 관계이다. 이 삼각은 어느 한쪽이 다른 두 쪽을 끌어안는 구도의 치정이다. 그러므로 이 치정은 평화롭다… 된장은 냉이의 비밀을 국물 속으로 끌어내면서 냉이를 냉이로서 온전하게 남겨둔다…’
‘...달래는 시련의 엑기스만을 모아서 독하고 뾰족한 창끝을 만들어낸다. 달래는 기름진 땅에서는 살지 않는다. 달래의 구근은 커질 수가 없다. 달래는 그 작고 흰 구슬 안에 한 생애의 고난과 또 거기에 맞서던 힘을 영롱한 사리처럼 간직하는데, 그 맛은 너무 독해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달래는 인간에게 정신차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쑥은, 그야말로 ‘겨우 존재하는 것들’ 이다. 그것들은 여리고 애달프다…이것들에게는 이 세상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슬픔과 평화가 있다. 된장 국물 속에서 끓여질 때, 쑥은 냉이보다 훨씬 더 많이 된장 쪽으로 끌려간다… 그 국물은 쓰고 또 아리다. 먹이 피라미드 맨 밑바닥의 아린 냄새가 된장의 비논리성 속에 퍼져 있다…그 냄새는 향기가 아니라, 고통이나 비애에 가깝다…쑥 된장국의 냄새는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곳의 정갈함을 일깨우기도 한다. 그 풀은 풀의 비애로써 인간의 비애를 헐겁게 한다.’
‘…미나리는 출신지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지나간 시간의 찌꺼기가 묻어 있지 않다. 미나리에는 그늘이 없다.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음을 안다….’
봄이 멀지 않았다. 오늘은 냉이밥에 달래장을 넣어 쓱쓱 비벼먹는 저녁을 준비해야 겠다.
< 김유경 - 시인, ‘시.6.토론토’ 동인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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