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간첩혐의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국정원 수뇌부의 책임은 묻지 않고 3급 직원 선에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이런 검찰 수사가 남재준 국정원장에게 면죄부를 줬다고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다.
국정원은 특정인을 간첩으로 몰아가기 위해 재판에 제출할 증거를 위조하고 조작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를 감추려고 또다른 거짓말로 덮었고, 언론 공작까지 서슴지 않았다. 재판 증거 조작은 그 자체로 중대한 문제지만 사건을 은폐하려 한 것은 정치적으로 훨씬 죄질이 나쁘다.
검찰 발표대로 국정원 직원들이 남 원장 등 국정원 최고 수뇌부의 지시 또는 묵인 없이 사건의 은폐까지 주도했다고 상상하긴 어렵다. 특히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진 이후에도 국정원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책임 회피에 급급했던 대목은 남 원장 책임이 크다.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엔 남재준 원장이 전반적인 대응책을 지휘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설사 이런 국기문란 범죄가 수뇌부도 모른 채 벌어졌다고 해도 심각한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국정원이 통제불능의 콩가루 집안이라는 얘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3급이라곤 하지만 국정원 직원들이 사법체계를 흔드는 증거조작에 개입한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밝혀진 이상,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이 부분에서도 남재준 원장의 책임이 가볍지 않다. 법적 책임은 논외로 하더라도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 직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한 지휘·감독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당장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하는 것이 국정원장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최소한의 태도일 것이다. 그가 그대로 직을 유지하는 것은 하급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하고 옹졸한 짓이다.
이런 범죄행위는 박근혜 대통령과 남재준 원장 취임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다. 국정원은 수시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다. 남 원장이 책임을 회피한다면 임면권자가 적절한 책임을 묻는 게 합당하다. 박 대통령이 남 원장을 해임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오롯이 박 대통령에게 돌아갈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감당해야 할 책임도 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와 지난해 대선개입 사건으로 국정원 개혁 요구가 빗발쳤을 때 남 원장에게 이른바 ‘셀프개혁’을 주문하며 남 원장을 감쌌다. 새누리당에서조차 ‘남재준 경질론’이 불거졌지만 외면한 채 끝내 침묵했다. 국정원의 최악의 국기문란 사건은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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