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건국 연원은 잘 알려진 것처럼 101명의 영국 이민자들이었다.
대영제국의 권력 전횡과 부패, 종교적 타락에 염증을 느낀 일단의 청교도 그룹은 1620년 일생일대의 결단으로 새 세상을 찾아 떠난다.
당시 아메리카 신대륙 버지니아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의 101명 외에 다른 한척의 배는 남아메리카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버지니아에 내린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믿는 그야말로 순수한 신앙인들이었던 반면, 남미를 향한 사람들은 ”하나님도 중요하지만 금 은 보화도 필요하다“는 물질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태운 두 척의 배가 서로 다른 땅에 도착한 뒤 4백년이 흐른 지금, 두 배의 당시 이민자들은 후손들이 사는 모습과 환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상이 가능하다.
하나님만 의지한 버지니아의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의 집, 즉 교회를 먼저 짓고 예배를 드린 뒤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전제군주의 권력횡포와 부정부패, 오염된 종교의 사슬을 끊고 인간다운 삶의 새 사대를 열어 가면서 이웃사촌으로 대화와 토론, 논쟁과 협의, 그리고 조정을 거쳐 합의안을 만들고 힘을 모아 외침에 투쟁하며 나라를 건설했다. 조지 워싱턴을 첫 대통령으로 뽑은 당시의 인구는 고작 4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 소국이 모국인 영국을 제치고 지금 세계를 주름잡는 민주주의 대국, 미국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미국이 신앙의 힘으로 강대국이 됐다는 종교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세운 첫 이민자들의 철저한 각오과 실천의 힘- 바로 그 청교도 정신이 후손에게 남긴 유산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신들이 피부로 겪은 모국의 부정과 불의를 자계하고 냉철하게 배제한 새 삶과 새 세상을 개척해 나가면서 그들은 신앙에서 비롯된 정신적 무장과 경험적 교훈을 한시도 잊지 않았음을 본다.
미국의 사례를 들어 이민자 된 우리네 형편을 대비하고 논하는 것은 무리요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통분모가 없지않다는 관점에서, 한번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볼만 하다는 생각도 든다.
무슨 사연이 있든 모국을 떠나 이민의 삶을 택한 기저에는 채워지지 않은, 또는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었기에 현실을 벗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민 땅이 한국보다는 앞선 나라인 캐나다인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나다에서 일군 새 삶에서 지난 날의 부족과 불만들을 변화시킨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영국의 이민자들이 황무지에 모국을 능가하는 대국을 일궜다는 데, 우리는 뒤진 나라에서 앞선 나라로 옮겼으니 그 몇 배 나름의 ‘유토피아’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은가. 정신적으로 든 물질적으로 든, 모든 면에서 옛 시절을 능가하는-.
안타깝게도 반세기를 맞았다는 10수만의 우리에겐 ‘아직’ 그런 자긍심을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아니 모국을 능가하기는커녕 더욱 추종하고 흉내 내고, 때론 못된 짓도 감싸기에 바쁜 잘못된 모국사랑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살펴보면 민망한 모습을 도처에서 본다.
이 곳에서도 우리들 신앙심은 깊어 교회와 사찰은 수두룩하지만, 일제치하 자주 독립정신을 심었고 국난에 분연히 일어섰던 의로움의 기백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모국의 세속화된 현실만을 뒤따르는 것일까.
국민을 섬겨야 할 공무원이 대접받고 군림하려는 구태와, 또 그들을 맴돌며 은덕을 바라는 일부 인사들의 비윗살이 보는 이들을 거북하게 만든다. 관존민비의 ‘전통’이 이민 땅에 기생하는 걸까.
단체마다 다툼과 말썽이 끊이지 않는다. 사색당쟁에 익숙해진, 그래서 서로 파탄나고 만 속성이 살아있는 걸까.
갈수록 뒷걸음치고 있는 권력의 오만과 일탈, 역사왜곡을 나무라는 소리는 작아지고, 오히려 두둔하고 대변하는 이들이 큰 소리 치는 이상한 현상이 판친다. 친일의 후예들, 독재의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이민을 많이 온 것일까.
잡은 자, 쥔 자들 그들만의 동아리에서 해치우면 오케이, 한탕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방자함은 저쪽과 이쪽이 너무도 닮은 꼴이다. 다수권력의 논리가 철칙이 되고 온갖 매체가 한 패거리 한 목소리로 찬양나팔을 불면서, 반대이론에는 눈감기나 종북몰이 둘 중 하나인-.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최근 한 신문사 출신들이 중심이 돼 만들어낸 이민사 작업에서도 얼핏 그런 자태가 보인다. 측근 둘러세워 해치우기에 제머리 깎기, 그리고 자화자찬의 평가까지가 엇비슷하다.
다시 메이플라워호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모국을 과감히 떨쳐냈고, 모국의 불의에 과감히 대적했고, 마침내 능가해 이제 훈수를 두는 그들 이민 대선배들 처럼 왜 우리는 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네 후손들은 조상을 뭐라고 평할까. 이민 유입이 줄면서 주변에선 “불황에 큰일” 이라는 아우성이 들린다. 어찌 우리는 모국을 떨쳐내고 훈계하고, 능가하지 못하는가. 그저 모국만 쳐다보고 꽁무니만 쫒는다는 이야기인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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