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눈물, 그리고 인공 눈물

● 칼럼 2014. 6. 9. 20:02 Posted by SisaHan
어느 글에 보니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눈물샘이 있어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눈물을 흘리게 되어있는데 그 눈물샘 가운데 남자의 눈물샘이 더 크다고 했다. 그런데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울면 남자답지 못하다면서 어른들이 꾸중을 하시는 바람에 옳게 울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조함을 당할 때 하나님은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남자가 울 일이 많기 때문에 더 큰 눈물샘을 주시고 울게 하셨는데 울지 못하니 결국 속으로 흘러 더 많은 아픔을 가지고 산다는 셈이다. 

오래 전에 한국의 어느 방송국에서는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다. 용은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씨 조선의 개국 시 아버지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면서 왕도 어떤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울 수밖에 없었음을 이야기했다.
어쨌던 사람은 울어야 한다. 슬프든지 괴롭든지 또는 기쁘든지 자신의 감정을 눈물로 나타낸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나타내 보이라고 울음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서 더욱 강조된 눈물은 자신의 죄악이나 허물을 생각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셨고 그 눈물을 귀하게 여기셨다.

부모님 주일을 지나면서 나는 큰 슬픔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다윗이 다른 지방으로 갔다가 돌아오니 자신이 머무는 성에 아말렉 족속이 침공하여 자신의 가족을 비롯하여 모든 부하들의 가족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저들은 울 기력이 없도록 울었다고 했다. 나는 그 본문을 보면서 자녀의 죽음 앞에 울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마음과 함께 그렇게 부모나 자녀의 육신적 죽음 앞에서 슬피 운다면 내 가족의 영혼을 위한 울음으로는 얼마나 울었을까 하는 반문을 던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가실 때 예루살렘 여인들이 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성민들이나 지도자들이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죄악 가운데 살 때 곧 임박한 환난이 있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대로 죄악 가운데 머물고 있는가 하는 탄식과 함께 여인들과 자식들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 성민이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강권하시는 말씀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울어봤을까? 자신의 삶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워서 그리고 나의 자녀들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서 탄식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 본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 그렇게 눈물 흘리며 살지 못하는 것을 본 선지자들은 울음꾼을 불러서라도 울라고 가르쳤다. 오늘의 표현을 빌면 인공 눈물이라도 넣어가면서 울 수 없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번에 한국의 해양 참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대통령만 아니라 목사나 장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그리고 많이 울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의 책임인데. 기독교인의 숫자가 한국 인구의 1/4 이라고 자랑했다면 그것은 기독교회가 한국의 선장이나 마찬가진데 우리도 먼저 달아나고 있지않는가? 무책임하게.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