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 시절, 교수들 주도의 연구용역에 조교로 일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사회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부를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면담 대상자들이 자신은 뭔가 박탈당한 상태라 여기면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나는 우리 사회에서 돈과 권력, 지위와 명성에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 피해의식과 불안감을 갖고 있으며, 자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것이 언제나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기업 소유자들도 언제나 위기의식,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특히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잃을 것이 많으니 언제나 불안하고 빈자의 공격을 의식하여 공포감을 갖는 경향이 있고, 또 그들의 욕망 자체가 불안을 수반하는 법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 최상층이 갖고 있는 불안감은 좀더 다른 연원을 갖는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권력·부가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 얻어진 것이 아닌 데서 오는 원천적 불안감, 사회운동 진영이 그들의 과거나 도덕성을 거세게 공격한 것을 의식한 피해의식 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국 고전 <대학>(大學)에는 “편안한 이후에 능히 깊이 생각할 수 있다”(안이후능려:安而后能慮)는 말이 있다. 극심한 대립과 전쟁 상태에서는 깊고 멀리 생각할 수 없고,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게 된다. 그런데 위기는 사실 주관적이다. 권력자 자신이 깨끗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고, 비판자들이 자신을 도덕적으로 부인하면 단순한 비판자도 ‘적’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포용하기보다는 국가안보를 들먹이며 없애려 할 것이다.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 독재정권하에서 권력과 부를 누린 사람들은 매우 불안한 상태에 있었고, 그래서 권력을 잡은 후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집착을 하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학생들까지 적으로 취급해서 탄압했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강한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통합진보당을 해산 청구하고, 국정원과 검찰을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하고, 흠결이 많아도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칠 사람들을 기용한 것은 이 정부가 국가의 미래나 장기 정책을 검토할 여유가 없고 쫓기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정부에서 대통령 임기 안에 효과가 나오지 않을 사회정책, 즉 교육·복지·노동정책을 거의 펴지 못한 것, 통일을 ‘대박’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영세자영업자·비정규직·청년실업자 등 구체적 대상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그냥 ‘경제 살리기’만 주문처럼 반복하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지난 대선 부정의 과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자기방어에 급급한 박근혜 정권하에서 3년을 더 견뎌야 하는 우리는 참 딱한 처지에 있다.
권력과 부를 가진 세력이 편안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정치공동체의 미래를 깊이 고민할 수 있고 멀리 보는 정책을 구상하고 또 실천할 수 있다. 정부의 정책은 지지율 제고와 표를 얻기 위한 정략의 산물이어서는 안 되고 국민의 처지와 나라의 미래를 위한 숙고의 결과여야 한다. 그게 없을 때 ‘종북몰이’나 경제‘성장’에 집착하게 된다.
광복 70년이 흘렀다. 지난 70년간의 분단과 사실상의 전쟁 상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30년, 100년을 내다보는 보수 지도자나 세력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이제는 좀 편안한 마음을 갖는 지도자, 특히 자신감 있고 미래를 걱정하는 보수세력이 나올 때도 되었다. 그러자면 국민들이 ‘종북몰이’를 써먹는 정치가나 언론을 퇴출시킬 안목이 있어야 한다. 남남 화해를 먼저 해야 남북 화해와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중국과 미국의 틈에서 지혜를 발휘할 수 있다. 피해의식과 불안감이 없는 ‘보수’가 나와야 그와 맞수가 되는 진보가 만들어질 수 있다.
< 김동춘 - 성공회대 사회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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