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교가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우리 외교 전략을 주도적으로 펼치기는커녕 한반도 관련국들에 대한 우리 입지마저 좁아지는 양상을 보인다. 기존 진용과 접근방식으로는 더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가능성이 크다. 외교 전략과 체제, 사람 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때다.
무력한 한국 외교를 실감케 한 최근 사례는 미-일 신밀월 체제의 구체화다. 아베 신조 일본 정권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과거사 문제에서 역주행한다. 미국은 은근히 ‘과거사 묻어두기’를 우리나라에 요구하면서 중국을 겨냥한 일본의 군사역할 및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밀어붙인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문제는 미-중 사이에 낀 우리 처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문제는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다. 게다가 박근혜 정권 3년차를 맞았지만 핵심 외교전략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북한 핵 문제와 남북관계도 개선될 조짐이 없다.
외교 위기가 이렇게 심화하는데도 정부는 무신경하다. 4일 국회에 나온 윤병세 장관은 반성하는 모습 대신 ‘잘하고 있는데 왜 그러나’라는 식의 태도를 나타냈다. 박 대통령이 이날 한-미 관계와 관련해 전작권 환수 재연기, 방위비 분담 협상, 원자력협정 개정 등을 성과로 꼽은 것도 급변하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박 대통령이 중-일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열린 반둥회의 60돌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남미 순방에 나선 것은 우리 외교 전략이 얼마나 겉도는지 잘 보여준다. 이렇게 가다간 한반도 관련 사안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력조차 잃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
우선 인적 쇄신이 절실하다. ‘자화자찬 외교’의 진원지인 윤병세 장관은 이미 외교의 구심점이 될 역량을 잃었다. 외교안보 전략의 가온머리(컨트롤타워)가 돼야 할 청와대 국가안보실이 제구실을 못하는 것도 큰 문제다. 책임자 교체까지 염두에 두고 어떤 식으로든 정비가 요구된다. 외교 전략을 전체적으로 점검해 다시 설정하고 적절한 실행 방안과 체제를 갖추는 것은 더 중요한 과제다. ‘미·일 대 중국’이라는 대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동북아 평화협력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균형외교가 필수다. 한-미-일 안보협력을 꼭 필요한 수준에서 제어하면서 일본이 과거사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핵 문제를 풀기 위한 노력이 외교 재정립에 핵심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한반도 관련 현안을 방치한 채 주변국들의 움직임에 사안별로 대처하는 기존 방식으로는 외교 주도력이 생길 수가 없다. 정부는 사태의 급박성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임기는 곧 내리막길을 걷게 되며 내년에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외교를 재정립해 실행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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