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속지 마라. 미국× 믿지 마라. 일본× 일어난다. 조선× 조심하라.”
1960년대 초까지 어른들한테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말이다. 이건 2차대전 패전 후 철수하는 조선총독부가 심리전 차원에서 퍼뜨린 말이다.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기 위해서. 그런데 광복 70년이 되는 시점에 아베 일본을 보면서 70년 전 총독부가 퍼뜨리고 간 말이 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작년 7월 초 일본은 헌법 9조(전쟁 포기)에 대한 ‘해석적 개헌’ 방식으로 일본의 해외출병을 합법화했다. 오는 4월 말 아베의 미국 방문 때 ‘미-일 방위협력지침’이 개정되면, 앞으로 일본은 동맹국 미국의 후방지원 명분하에 ‘집단적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어디에나 출병할 수 있게 된다. 패전 일본이 70년 동안 꿇었던 무릎을 펴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4월 셋째 주말 워싱턴에서 미·일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시 한국의 주권을 존중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4월 말 개정될 미-일 방위협력지침에는 그걸 명문화하지는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국의 주권 존중’을 미-일 간에 말로만 합의하고 문서화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을 미-일 간에는 사전합의 해놓고 우리에게는 출병 직전에 ‘주권 존중’ 형식만 갖춰 통보(사실상 사후통보)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찌하랴? 2012년 4월17일 찾아오게 돼 있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다시 맡겨놨으니 미국이 결정하면 일본군의 한반도 출병도 감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을.
한편, 지난 22일 자카르타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연설에서 아베는 “지난 전쟁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담화(1995)나 고이즈미 담화(2005)에 쓰였던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사죄’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 미국 하원 의원 25명이 연명 서한을 보냈지만, 4월29일 아베의 미 상·하원 합동연설 논조 자체가 바뀔 가능성은 적다. 어희(말장난) 수준의 표현 변화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전범 후손으로서 아베의 정체성과 최근 우경화돼온 일본 대외정책의 방향성 때문에 8월로 예정된 ‘아베 담화’에서도 아베는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8월)을 계기로, 일본도 (원폭)피해국임을 부각시키면서, “이제 미래를 위해 손잡고 나가자”는 식으로 과거사를 매듭지어 버리려 할 것 같다.


그러면 일본이 해외출병을 합법화할 수 있게 된 국제정치적 배경, 과거사에 대해 후안무치하게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일본의 이런 정책에 대해서 미국은 왜 슬그머니 일본 편을 들고 있는가?
나는 미국의 대중정책이 바뀌면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외교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본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빠른 속도로 커지면서, 중국은 ‘중화부흥-중국몽’ 실현을 국가목표로 설정해놓고 미국에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했다. 사실상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도전하는 셈이다. 이런 중국을 미국이 ‘아시아 회귀-아시아 재균형’ 정책으로 견제하려 하지만 힘이 부친다. 앞으로 10년간 국방비를 매년 500억달러씩 삭감해 나가야 할 정도니까. 이 때문에 미국은 자기 돈으로 군사력을 키워 중국을 견제해줄 동맹국이 필요해졌다. 이에 일본이 적임자로 뽑힌 것이다.
미국이 이이제이로 중국을 견제하는 셈인데, 아베는 이걸 일본이 정상국가로 되고 나아가 동아시아 패권국가로 부활하는 디딤돌로 삼으려 할 것이다. 중국에 ‘중화부흥-중국몽’이 있듯이, 일본도 2차대전 패전으로 좌절된 ‘대동아공영-일본몽’을 아직 꾸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야망이 없다면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시인·사과를 악착같이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런 점에서 우경화돼 가는 일본의 움직임 속에는 ‘일본몽’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의 광복 70년에 패전 일본은 다시 일어서고 우리 외교의 앞날은 점점 더 험난해져 가는 것 같다.
< 정세현 - 전 통일부 장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