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내내 거실에서 공기정화를 위해 한쪽 구석에 놓아 두었던 작은 나무 잎사귀가 마르기 시작했다. 물도 줘보고, 햇빛도 조금 잘 드는 곳에 놓아 주면서 건강한 회복을 기원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줄기에서 점점 물기가 마르더니 아예 거추장 스러워 보이는 자신의 모든 잎들을 다 떨어뜨려 버린 채 나는 이제 죽었다고 스스로 체념한 듯 생명의 기운은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작은 나무를 주신 분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냥 버릴 수 없어서 교회 현관에 두면 혹시 따스한 볕에 적당한 산소를 통해 되살아 날수도 있겠다 싶어 교회 현관 다른 실내 정원수들 틈에 두었지만 역시 그냥 다 말라 버린 듯 물기 조차 없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나무가 죽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리려고 하는데 아내가 혹시 모르니까 밖에 세워둬 보자고 했다. 현관에 두면 미관상 좋지 않아서 밖에 한쪽 구석에 사람들의 눈길이나 관심도 닿지 않는 곳에 혼자 있도록 두었다. 그 후 몇 주가 지난 며칠 전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신기한 것이 보였다. 말라버린 가지에 가녀린 잎 하나가 보였다. 혹시 어디서 날아와 붙어버린 잎인 줄 알고 다시 가까이 들여다 보니 오호라! 마른 가지에서 너무나도 가냘픈 숨결이 돋아나 그 끝에서 생명의 손짓을 하고 있었다.


때론 우린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경우들이 있다. 특히 내가 필요하다 싶어서 소유하고 있다가 이젠 그 가치가 상실되었거나 불필요하게 되면 버리거나 없앤다. 심지어 유기견 같은 경우처럼 생명을 버리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한 이후에, 거추장스럽다 싶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해 나가고 있는 유물론적 사고이다. 물질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지만, 사람까지 사물화 시켜버림으로써 돈으로 한 인간을 평가하고 심지어는 사람의 신체까지도 돈으로 사고파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그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받은 신령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소유나 가치에 따른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온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들로 아끼시고 소중히 여겨주신다.


이 세상은 ‘포기’에 너무나 쉽게 나를 던져 버린다. 자살률이 높아지는 것은 그만큼 포기라는 악한 영이 우리 인간들을 삼켜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랑하는 교민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임을 명심하시고, 그 어떤 일이든, 무엇보다 우리 이웃에 대한 사랑을 쉽게 포기하지 마시길 부탁드린다. 탕자의 아버지는 그 아들을 끝까지 기다렸다. 만약 오지 않았다면 올 때까지 그 아들을 문밖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기다림은 기도다! 기도하는 자는 기다림의 인내를 실천하는 자다. 우리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끝까지 한 영혼에 대한 구원과 회복을 위해 기도하길 멈추지 말자.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 강정길 사관 - 구세군 토론토한인교회 담임사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