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고 생각할 때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이 단어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면 필자는 왠지 그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것은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혼자의 힘으로 살아 갈 수는 없습니다. 서양문화는 그렇지 않지만, 한국문화 속에서는 특히 ‘우리’라는 말을 쓰기 좋아합니다. ‘우리’의 사전적 의미는 대명사로 말하는 이가 자기 편의 여러 사람을 함께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사용하기에 따라서 안좋을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긍정적입니다. 필자는 ‘나’와 ‘우리’가 인생에서 둘 다 필요한 것이지만,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와 ‘우리’를 생각합니다.
 
첫째, ‘나’입니다. 
어느 신문 기사내용에 흥미로운 실험결과가 실린 기억이 납니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은 부부 154쌍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는 데, 행복한 부부일수록 ‘나’대신 ‘우리’를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연구진은 실험실에서 각각의 부부들에게 의견이 상충하는 문제를 놓고 15분 동안 대화하게하고 이들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을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의견 대립이 있을 때도 ‘우리’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부부일수록 심장박동과 혈압이 안정적이었으며 결혼 생활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더불어 협력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입니다. 에스더에서 유대민족을 멸족시킬려고 했던 하만은 에스더서 5:12절을 보면, 그가 특별히 강조하는 단어가 있는 데 ‘나’입니다.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받은 자는 나 밖에 없었고….”  필자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때로 필요 이상으로 ‘나’를 높이고 싶은 시간이 있습니다. 이 때는 스스로 조심해야 할 시간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4장 28-31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세계를 정복하고 특히 ‘나’를 강조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너는 끝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원리에 충실해서 살면 내가 스스로 ‘나’를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둘째, ‘우리’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가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땅에 떨어진 금덩어리를 주웠습니다. ‘우리가 횡재했네요’ 동료가 말하자 금덩어리를 주운 사람은 정색을 하고 ‘우리라고 하지 마시오. 주운 사람은 나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소유’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조금 후 이 금덩어리를 잃은 산적들이 칼을 들고 두 사람을 쫓아오자 금덩어리를 가진 사람이 ‘이제 우리는 죽게 생겼소’라고 다급하게 외쳤습니다. 그러자 동료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우리라고 하지 마시오. 주운 사람은 당신이니까…’
우리는 살면서 필요할 할 때만 ‘우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변함없이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이 것은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우리’가 있는 곳에는 평안, 질서, 은혜, 축복, 부흥, 협력이 있으며 ‘우리’가 있는 곳에는 상호의 위로와 격려가 있습니다(전4:9-12). 초대교회는 ‘우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부흥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참 신앙인은 ‘나’보다는 ‘우리’에 눈이 떠야합니다. 8월에 캐나다 대신노회에서는 ‘우리’가 되기 위한 노력으로 토론토에서 약 1700km 떨어진 가스페(Gaspe Peninsula)를 단합수련회 차원에서 자동차로 다녀왔습니다. 목회현장을 비우고 목회자와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서 캐나다의 바다도 처음 보았고, ‘우리’가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역시 ‘우리’가 되려면 자주 함께 시간을 내야하고, 같이 기도하며 내가 먼저 양보하고 봉사하며, 상대를 배려하고 노력할 때 ‘우리’가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종민 목사 - 샬롬 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