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엘살바도르 대통령궁 트위터에 올라온 엘살바도르 감옥 사진. 수백명의 죄수들이 옷을 벗은 채 공터에 내몰려 있다.
30대 대통령 조직범죄와 전쟁 명분 독재자에 버금가는 행보
하루 18명씩 살해당하는 치안불안, 교도소가 조직범죄 온상
“다른 범죄조직원들을 같은 방에 가두고, (신호를 주고받지 못하게) 감옥 구조를 바꾸는 등 강력한 조처 뒤, 범죄 조직과 관련한 살인, 폭력 등이 2주 동안 보고되지 않았다.” 18일 영국 <데일리 메일>은 보름 전 수십명의 피살 사건으로 비롯된 엘살바도르 정부의 ‘감옥 봉쇄’ 조처가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교정시설 재소자들을 임시 사면하는 상황에서, 엘살바도르는 거꾸로 수감자들을 홀딱 벗겨 ‘거리 없애기’를 하면서 재소자 인권침해 비판을 받았다. 엘살바도르의 1981년생 대통령인 나이브 부켈레는 조직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독재자에 버금가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감옥 봉쇄 조처가 성과를 거둘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첫 밀레니얼 독재자’로 가는 길을 재촉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평생 후회하도록 할 것” 대통령이 감옥 사진 올리라 지시
머리를 삭발한 채 웃통이 벗겨진 수백 명의 죄수들이 손을 뒤로 묶인 채 감옥 공터에 앞뒤좌우로 밀착해 앉아 있다. 마스크를 한 이들이 있지만, 상당수는 아무런 보호 장비도 하지 않았다. 옆에는 중무장한 경찰들이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대통령궁 트위터에 올리 게 한 ‘속옷 차림으로 결박당한 수백 명의 죄수 사진’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는 “범죄 조직원들이 이번 살인을 평생 후회하게 할 것”이라며, 경찰과 군대 등에 무력 사용을 허가했다. 범죄 조직별로 별도 감방에 수용하던 것을 ‘혼합 수용’으로 바꿨다. 지난달 24~26일 다수 살해 사건으로 국민 53명이 숨진 데 따른 조처다. 하루 18명씩 살해당한 것으로, 엘살바도르 전체 인구(648만명)에 견줘 상당한 규모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감옥에 갇힌 폭력 조직 두목 등이 이번 상황을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 3월 초 엘살바도르 군인이 괴한의 공격을 받고 숨진 뒤에도, 교도소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면회 등 외부 접촉을 전면 차단했다.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알자지라>와 인터뷰에서 “폭력 조직들이 감옥에서 휴대폰과 컴퓨터, 와이파이 등을 사용한다”며 감옥이 범죄조직의 본부가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MS-13, 18번가’ 양대 폭력 조직에 세계 최고 살인율
부켈레 대통령은 지난해 2월 범죄 조직과의 전쟁, 부패 척결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당시 38살로, 민족해방전선(FMLN)과 국민공화연맹(ARENA)이 30년간 이어온 양당 체제를 깬 엘살바도르 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그가 범죄조직 소탕을 핵심 공약으로 내건 것은 1990년대 들어 폭력 조직이 판치면서 살인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엘살바도르에서 살해당한 국민은 2019년 10만명 당 35.8명으로 치안이 불안하고 범죄율이 높은 중남미에서도 가장 나쁜 수준이다. 앞서 2015년에는 10만명 당 104명이 살해당해, 시리아 등 전쟁 중인 나라를 제외하면 세계 최고였다. 한국의 경우 10만명 당 0.6명, 한해 300여명 수준이다.
범죄 감소를 공약한 부켈레 대통령에게 살인 사건 급증은 큰 부담이다. 엘살바도르 언론 <델 파로>의 오스카 마르티네스 기자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살인을 줄이는 것은 이 정부의 핵심 과제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부켈레 대통령의 과격한 조처는 이번만이 아니다. 그는 지난 2월 국회가 치안 예산 편성을 머뭇거리자,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군경을 거느리고 국회에 쳐들어갔다. 군경 무장에 필요한 1억900만 달러 차입 계획을 처리해 달라는 요구였다. 야당 의원들은 “쿠데타 시도”라고 비난했고, 국제인권단체는 “부켈레가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나이브 부켈레(39) 엘살바도르 대통령.
■ 난민, 조직 결성, 귀향, 조직확대…폭력의 악순환
엘살바도르의 높은 살인율의 바탕에는 ‘엠에스(MS)-13’과 ‘18번가’라는 양대 범죄조직과 그들 간의 다툼이 있다. 1990년대 형성된 두 범죄조직은 에콰도르·온두라스 등 이웃 나라는 물론 미국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넓게 퍼져 활동한다. 국제위기그룹(ICG) 자료를 보면, 엘살바도르 인구의 1%에 가까운 6만5천여명이 범죄 조직에 속해 있고, 전체 인구의 8%인 50여만명이 직간접적으로 범죄조직과 연계돼 있다. 이들은 엘살바도르 자치단체 262곳 중 247곳에서 사업체 70%를 탈취해 매년 수천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피해자는 대부분 중소기업과 밀수업자, 운송 노동자 등이다.
이들 조직은 2015년 버스 운행을 볼모 삼아 감옥에 갇힌 조직원의 석방을 요구할 정도로 막강하다. 정부가 이를 거절하고 버스를 운행하자 이들은 운전사 여려 명을 살해했다. 엘살바도르 대법원은 2015년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며 두 조직을 ‘테러단체’로 지정했다.
범죄조직은 1980년대 엘살바도르 사회를 뿌리째 뒤흔든 내전에서 비롯됐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우익 정부에 대한 좌익 세력의 봉기로 시작된 엘살바도르 내전은 1980년부터 1992년까지 이어졌고, 8만~10만명의 사망자와 100만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고, 준비없이 옮겨간 일부 엘살바도르인들은 미국 범죄 조직을 본 떠 조직을 만들고 확장해 나갔다. 당시 형성된 범죄조직이 바로 엠에스-13과 18번가였다.
엘살바도르 출신 범죄자를 본국으로 추방한 미국의 조처는 엘살바도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들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고향으로 돌아가 사회를 장악할 정도의 거대 범죄조직을 만들었다. 양대 조직원 6만여명은 5만2천명인 엘살바도르 군·경보다 규모가 크다. 또 감옥은 범죄 조직원들의 새 근거지가 됐다. 엘살바도르 학자 지네타 아길라는 “감옥에 조직원들이 몰리면서, 교도소는 조직을 안정화하고 공식화하는 새로운 공간이 됐다”고 말했다.
거대 범죄조직의 활동은 지역 경제 붕괴와 범죄 활성화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일상적인 성폭행에 노출됐고, 청년들은 살기 위해 범죄조직에 가입하거나 고국을 떠나는 선택을 강요당했다. 국제위기그룹은 “범죄조직원은 평균 연령 25살, 첫 가입 연령 15살이다. 월 250달러를 벌지 못하는 가정 출신에 중학교를 마치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라고 분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 거주하는 미등록 엘살바도르 이주민 20여만명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는 강력한 반이민 정책을 펴고 있다. 이런 조처가 엘살바도르 범죄 조직에 새로운 ‘먹잇감’이자 조직원을 확보할 ‘원동력’이 되고 있다. < 최현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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