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이후 진정한 사죄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본, 사과는 했지만 반쪽짜리 사과
‘고노 담화’, 한국사회 민주화가 만들어낸 변화
‘고노 담화’ 뒤집고 거꾸로 내달린 일본 우익

적반하장의 일본 우익, 정말 피곤한 건 한국
오히려 일본정부 편을 드는 한국 친일정부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1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1주년 한미일 협력 성과 등 현안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2024.8.18. 연합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지난 16일 한국방송(KBS) ‘뉴스라인 더블유’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한 발언은 사실과 어긋난다. 사실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는 관련 질문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엄중하게 따지고 변화를 시도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며 “(사과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게 과연 진정한가”라고 대답했다.

그의 발언 중에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도 그 맥락으로 보건대, ‘일본이 과거사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필요한 말을 했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가 지난해 3월에 “우리 외교부가 집계한 일본의 공식 사과가 20차례가 넘는다”고 말했다가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의 발언이 논란을 빚자,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나서서 “한·일 국교 수립 이후 수십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의 공식적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가 있었고, 그러한 사과가 피로감이 많이 쌓였다”며 김 차장의 말을 변호했다.

사과는 했지만 반쪽짜리 사과

일본이 여러차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반쪽짜리 사과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정부는 1990년대 초에,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들이 일본군 당국의 요청으로 설치, 운영된 위안소들에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 등의 형태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는 참혹한 고통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했다. 일본정부는 약 2년에 걸친 자체 조사를 통해 그런 사실을 확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한다고 문서로 작성해 공식적으로 발표까지 했다.

‘고노 담화’도 자발적 발표 아니야

그것이 1993년 8월 4일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고노 담화’다. ‘위안부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아래에 번역해서 붙임)가 정식 명칭인 그 담화 뒤에도 유사한 내용의 일본정부 담화들이나 총리의 발언들이 발표됐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1993년 8월~1994년 4월) 때도 그랬고,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1994년 6월!1995년 8월) 때도 그랬으며(‘무라야마 담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2009년 9월~2010년 6월)과 간 나오토 내각(2010년 6월~2011년 9월) 때도 그랬다.

그런데 일본정부의 사죄와 반성은 거기까지였다.

‘고노 담화’도 일본이 자발적으로 먼저 발표한 게 아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1924~1997) 할머니가 처음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고, 그것이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전에도 그런 증언의 단편적인 조각들이 드물게 흘러나오기는 했지만, 김학순 할머니처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실명을 드러내면서 그 치욕스런 과거를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었다.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일본의 '위안부' 범죄사실에 대해 공개 증언하는 피해자 김학순 학머니.

 

한국사회 민주화가 만들어낸 변화

그때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1989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냉전 또한 무너져 내린 시기다. 베를린 장벽 붕괴 한 해 전인 1988년에 서울올림픽이 치러졌다. 그 한 해 전인 1987년에는 일반시민들까지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학생시위에 가담했던 ‘6월 항쟁’이 일어났다. 5공 군부독재체제가 ‘ 6.29선언’을 통해 ‘호헌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 민주화’의 1단계가 성취됐다.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그런 시대변화 속에서 이뤄졌다. 그 전까지 군부독재 체제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런 말을 꺼내지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게 억압했다.

그 증언으로 일본사회가 뒤집혔고, 그 소식은 세계로 전파돼 필리핀, 네덜란드, 중국 등 곳곳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이 공개 증언에 나서고 소송을 제기했다. 한국 민주화가 세상을 그렇게 바꿨다고도 할 수 있다.

‘고노 담화’ 뒤집고 거꾸로 내닫기 시작한 일본 우익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당 등 이른바 전후 ‘리버럴’ 세력이 살아 있던 일본의 자민당 미야자와 내각은 김학순 할머니 증언에 놀라고 ‘평화 인권국가 일본’ 이미지가 국제적으로 위태롭게 되자 사실 조사에 들어갔다. 장기간의 조사 끝에 1993년 8월 4일에 ‘고노 담화’가 발표됐다. 담화는 조사해 보니 김 할머니 증언이 사실이더라는 것, 일본군 당국이 주도한 그 일로 고통을 당한 분들에게 사죄하고 반성한다는 것을 최대한 표현을 절제해가며 간결하게 기술했다. 그 뒤에 일본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담화들과 발언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김학순 쇼크’에 망연자실했던 일본 우익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 일본의 과오를 부정하고, 과거사 반성을 자학이라 몰아가는 ‘자유주의 사관’이 등장하고 이른바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등의 우익세력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다. 국회 내에도 그런 움직임이 퍼졌으며, 그런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아베 신조 전 총리다.

 

아베 신조

그 최전선에 섰던 아베 신조

과거사 반성 언설들이 자학사관이라는 우익 바람 속에 제국일본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영광의 과거’로 기억하도록 학습받은 전후 세대 정치인인 그는 일본군 위안부 등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의사로 동원에 응했고,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고노 담화 내용의 핵심을 뒤집어버렸다. 2006년 9월에 총리가 된 아베는 2012년 12월의 2차 내각 이후 2020년 9월까지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를 기록하면서 줄기차게 고노 담화 내용을 부정했다. 핵심은 일제 강제동원은 강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베 이후 진정한 사죄 단 한 번도 없었다

김태효 1차장이 일본이 수십 번 과거사를 반성했다는 것은 아베 이전까지는 어느 정도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아베 집권 이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과거사를 제대로 인정하고 사죄한 뒤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베 내각 뒤의 스가 요시히데 내각도, 지금의 기시다 후미오 내각도 그 점은 아베 내각을 철저히 계승했다. 그들은 아직도 공개적으로 안중근과 김구를 일본 근대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와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죽인 “테러리스트”라 주장한다.

적반하장의 일본 우익, 정말 피곤한 건 한국

그러니 수십 번을 사죄하느라 일본이 피로해졌을 것이라는 김 차장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피곤하고 성가신 쪽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다. 일본이 고노 담화의 조사결과와 취지를 인정하고 수용한 호소카와, 무라야마, 하토야마, 간 내각 때처럼만 대응했어도 피해자들을 비롯한 한국인들이 그렇게까지 “과거사를 인정하고, 반성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요구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인들 중에 그토록 피곤하고 지겨운 일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아베 신조 이후, 그 전 정권들이 그나마 털어놓았던 사실조차 다시 부정하고 오히려 한국인들을 ‘아무 잘못 없는 일본’한테서 돈이나 뜯어내려는 파렴치한 ‘반일 쟁이’로 몰아가는 일본 우익들이야말로 한국인들을 정말 화나고 피곤하게 만든다.

오히려 일본정부 편을 드는 한국정부

최근의 군함도와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과정에서도 한국인들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었나.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조선인들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동원당한 사실”을 전시실(산업유산정보센터)에 사실대로 기록해서 관람자들이 볼 수 있게 하라고 여러 차례 지적당하고 경고를 받았음에도 일본정부와 지자체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군함도에선 전시물에 강제동원 사실을 적시하겠다고 약속해 놓고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강제동원이 아니라는 증언들만 모아 전시했다고 <아사히신문> 등은 보도했다. 사도광산은 아예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거론도 하지 않았으며, 그런 일본정부 방침에 윤석열 정부는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은 채 동의해줬다.

그런 잘못을 지적하면 ‘반일’로 몰아간다. 정말 피곤하고 지겨운 일이다.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내각의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담화(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다음과 같다.

 

고노 담화.     일본 외무성 온라인 사이트

 

위안부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

1993년 8월 4일

이른바 종군위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는데,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됐기에 발표하게 됐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걸쳐, 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돼 있었고, 수많은 위안부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 요청으로 설치 운영(設營)됐으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서는 구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로 그 일을 담당했지만, 그럴 경우에도 감언과 탄압을 통해서 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당한 사례가 수다하고, 게다가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고통스런 것이었다.

그리고 전지(전장)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일본을 별도로 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당시 조선반도는 우리나라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탄압을 통해 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서 이뤄졌다.

어쨌든 본 건은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안긴 문제다. 정부는 이번 기회에 다시한번 그 출신지를 불문하고 이른바 종군 위안부로 수많은 고통을 당하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전해 드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나라가 어떻게 표시할지에 대해서는 유식자들의 의견 등도 요청해서 앞으로 진지하게 검토해 가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역사의 교훈으로 직시해 가고자 한다. 우리는 역사연구, 역사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래 기억에 담아두고 같은 과오를 결코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한번 표명한다.

또한 본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소송이 제기돼 있고, 또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쏠리고 있어서, 정부도 앞으로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서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려 한다.  < 한승동 민들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