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와 정치 철학자들의 사상은 옳을 때나 틀릴 때나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강력하다. 사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 사상들이다. 어떤 지적인 영향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믿는 실무가들도 이미 고인이 된 어떤 경제학자의 노예이기 쉽다. … 나는 기득권의 위력은 사상의 점진적 침투에 비한다면 매우 과장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 선용되건 악용되건 궁극적으로 위험한 것은 사상이지 기득권이 아니다.
윤석열 친일 정책 앞뒤서 반일종족주의그룹 활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 M. Keynes, 1883~1946)가 불후의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의 말미에 남긴 말이다. 1930년대에 케인스의 경제사상은 일거에 신고전학파 경제학을 무너뜨리며 전 세계 경제학계와 정부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1919년에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견하여 예언가의 자질을 보였던 케인스는 자신의 경제사상이 겪을 운명에 대해서도 정확히 예언한 셈이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약 40년에 걸쳐 세계 경제학계를 석권하며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했던 케인스 이론도 1970년대 오일쇼크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국면에도 물가가 상승하는 상태)이 발발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 대신 등장한 것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은 신신고전학파 또는 새고전학파로 불린다. 과거 신고전학파의 이론을 더욱 시장 중심으로 극단화한 경제학으로 오늘날 세계 경제학계는 이 학파가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아는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출발은 케인스주의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던 1947년, 하이에크가 스위스 몽펠르랭에 '자유주의 사상가들'을 모아서 케인스주의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는 것을. 그러니 위에서 소개한 케인스의 예언은 케인스주의의 승리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승리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뉴라이트의 득세는 오랜 사상투쟁의 결과
▲ 2020년 5월 11일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발간 기자회견에서 대표저자인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 연합
최근 한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뉴라이트로 지목한 인사들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과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임명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케인스의 예언을 떠올렸다. 8월 13일 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역사·역사교육 관련 기관 임원 중 최소 25개 자리를 뉴라이트 혹은 극우 성향 인사들이 차지했다고 한다. 실로 '역사전쟁'을 방불케 하는 전개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광복회 및 독립운동 단체, 역사 관련 학회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친일적 행태를 중단할 것을 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얼핏 보면 윤석열 정부가 돌발적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런 행태의 배경에 뉴라이트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불장난이 아니라 한 사상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초해 추진하는 전략적 행위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지금까지 출몰한 뉴라이트 계열 단체는 뉴라이트 전국연합, 뉴라이트재단, 자유주의재단, 뉴라이트싱크넷, 한국현대사학회 등 다양하고 관련 인사들도 여럿이지만, 사상 면에서 핵심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필두로 한 '반일종족주의그룹'이다(<반일종족주의>는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등 6인이 2019년에 간행한 책으로, 국내에서 10만 권 이상, 일본어 번역서가 일본에서 4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이듬해에 그들은 후속 작업으로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을 펴냈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 교과서포럼을 만들어 역사 교과서 개정 운동을 벌였고, 안병직, 이대근 등 그들의 스승 격인 인사들은 뉴라이트재단을 결성해 극우 성향의 정치 운동을 펼치면서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중심은 이영훈, 김낙년, 주익종 3인이다. 이들은 모두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제자로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함께 뉴라이트 사상을 연마했고, 특히 이영훈은 2016년 이승만학당을 설립하여 뉴라이트 사상 대중화와 이승만 띄우기에 몰두해 왔다. 주익종은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이영훈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승만학당은 설립 후 올해까지 매년 두 차례씩 3개월간 계속되는 오프라인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금까지 21기 교육을 마침으로써 최소 600명에게 면대면 뉴라이트 교육을 실시했다. 또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를 개설해 온라인 교육에도 열을 올렸는데 현재 구독자 수는 10만 5000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이고, 업로드한 동영상 수도 약 800개에 달한다.
케인스가 말한 '사상의 점진적 침투'를 위해 이보다 더 나은 전략이 있을까. 뉴라이트가 역사 관련 단체를 장악한 것은 물론이고 정권의 정책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이처럼 끈질긴 사상투쟁의 결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의 과거 행적과 언행을 두고 큰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사실 그는 뉴라이트 본류에 속한 인물이 아니며 그가 하는 말 또한 독창적인 언사라고 보기 어렵다. 예컨대 그가 작년 12월에 했다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진정한 광복"이라는 말은 이영훈의 오래된 건국절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에 불과하다.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노동자에 대해 제3자 변제를 추진한 것이라든지, 강제동원이 명기되지 않음에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허용한 것 등도 반일종족주의그룹의 주장을 수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윤 정부는 식민지기의 강제동원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에게 변제책임을 지우면서 1965년 한국 정부가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일괄 대리해 일본의 지원금을 수령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반일종족주의> 10장에서 주익종이 주장한 내용 그대로다. 사도광산 문제를 처리하면서 강제동원 명기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반일종족주의> 5~7장과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7, 8장의 주장을 사실상 수용한 것이다.
김형석보다 김낙년이 더 문제일 수도
▲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 지난 12일 오후 세종시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열린 근현대 인쇄출판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 '깁더: 우리책, 깁고 더하다' 전시 개막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
7월 30일 윤석열 정부는 반일종족주의그룹의 핵심 인물인 김낙년을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에 임명했다. 임명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게 주의가 집중되고 있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김낙년의 임명인지도 모른다. 김낙년은 <반일종족주의>와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 양쪽 모두에 공저자로 참여했는데, 그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쌀 수탈은 없었고 조선 농민은 일제의 농업정책 덕분에 소득이 크게 증가했음을 논증하는 것이었다.
김낙년은 '수탈이란 대가 없이 강제로 빼앗는 것'이라고 정의한 다음, 1920~34년 산미증식계획 시기에 조선 농민은 대가를 받고 쌀을 팔았기 때문에 '수탈'당한 것이 아니라 '수출'했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대규모 수출시장이 열렸으므로 조선 농민은 쌀 수출을 통해 소득을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김낙년의 견해는 눈을 조금만 돌리면 보이는 일제 말기의 공출제도와 산미증식계획 시기의 권력적 강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한계가 있다. 특히 수탈·강제동원의 개념을 협의로 정의한 다음 그에 꼭 들어맞는 사례가 없으므로 수탈·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일본 극우의 오래된 논법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보통 심각하지 않다.
게다가 김낙년은 일제강점기에 조선 농민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원인을 조선 전통사회에서 찾는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주 중심적 농정과 지주의 소작료 수탈 등 분명한 사회적 원인이 존재함에도 그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일제강점기의 소득증가와 생활수준 향상 등 긍정적인 현상은 모두 일제의 정책에서 비롯됐고, 가난과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조선 전통사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식민사관 그 자체가 아닌가. 학자로서 이런 견해를 갖는 것은 그의 자유일지 모르지만, 이런 사관을 가진 사람을 "한국학의 진흥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목표"로 삼는 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3년간 김낙년이 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어떤 기괴한 한국학이 만들어질지 심히 걱정스럽다.
뉴라이트 인사 임명 논란이 한창인 와중에 서울 지하철 역사에 설치되어 있던 독도 조형물이 철거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교통공사는 안전을 위한 선제적 대책이라고 설명했지만, 시민들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논란이 일자, 서울교통공사는 하루 만에 사과하고, 새로운 독도 조형물을 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일 이 조치가 최근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무관치 않다면, 여기서도 반일종족주의그룹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은 앞서 언급한 두 책에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가 없다며, '독도는 우리 땅'을 노래하는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도전한 바 있으니 말이다. 또 윤 정부가 이승만 기념관 설립을 추진하는 배경에도 이승만 띄우기에 몰두해온 반일종족주의그룹과 이승만학당의 영향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위안부 문제도 그들의 주장대로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
▲ 지난 5월 29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 일본영사관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헤결을 위한 부산여성행동 주최로 101차 부산수요시위가 열리고 있다. ⓒ 김보성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윤석열 정부가 본격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다.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일환으로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이 민간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책임으로 돌릴 수가 없다.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위안부 모집은 민간 주선업자와 보호자 간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 위안부는 끌려가서 속박당하고 착취당한 무능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며 인생을 개척했고 돈도 꽤 잘 벌어서 고향에 송금하고 저축도 했다. 위안소는 위안부들에게 수요가 확보된 고수익 시장이었다.'
나는 <<반일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한겨레출판)이라는 책에서 반일종족주의그룹이 이용한 사료와 구사한 방법을 일일이 검토해서 위의 주장이 몽땅 거짓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반일종족주의그룹 가운데 위안부 관련 서술을 주로 담당한 이영훈은,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일부러 부각하거나 과장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부정하는 부조적(浮彫的) 수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영훈의 주장은 기존 연구를 모조리 뒤집는 전복적 견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지만, 내용은 하나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가진 폭발성을 느꼈는지 아직은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극우 민간단체에서는 이미 곳곳에서 소녀상을 모독하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으니, 조만간 이 문제도 역사전쟁의 일환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면 윤석열 정부의 역사 관련 정책과 대일본정책의 지휘부는 반일종족주의그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들은 오랜 세월 함께 뉴라이트 사상을 연마해 왔고, 사료와 통계를 다루는 능력과 사상을 대중에게 설파하는 선전·선동 역량이 뛰어나다. 따라서 윤석열 정부의 역사전쟁은 만만히 보고 대처해서는 안 된다. 그 중심에 '고수'가 똬리를 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애국적 역사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 전강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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