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익의 범람, 우리는 어떤 지식인을 길러야 하나

● COREA 2024. 9. 18. 13:01 Posted by 시사한매니져

한국 청년들 ‘누구 돈’으로 ‘누구 위해’ 연구?

일본 재단, 낙성대 학파 등 신우익에 장학금
일본, 김태효 하나 키워 천·만배 남는 장사?

신우익 기승 근현대사보다 사회과학 더 심각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좋은세상연구소 대표

 

얼마 전 작고한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스코트(James Scott)는 자신이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원을 받아서 버마 현지조사를 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편 저명한 중국 전문가인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역시 자신이 미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아 중국 공산주의를 연구했다는 것을 나중에 반성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비판하는 <역풍(Blowback)>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이들은 젊은 시절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주의 전략 구축을 위한 지역연구 작업에 동원되었으나 68혁명 이후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매우 비판적이 된 예외적인 학자들이다.

제국주의, 식민지 경영 위해 지식 동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과 같은 일본 연구도 태평양 전쟁 시기 미 국무부가 일본과의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지원한 연구용역의 산물이었다. 사실 1950년대 냉전 초기, 1960년대 후반 데탕트 시기 이후 남미, 동아시아 연구를 한 미국의 사회과학자 중에서 미 국무부나 중앙정보국의 지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냉전체제 하에서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국가 정치경제 질서의 기둥이 되자 국가와 대학, 국가와 연구개발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세계적 정치학자인 헌팅턴(Samuel Huntington) 등의 비교정치학 이론, 민주주의 이행론도 이런 정보기관의 지원 위에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촘스키는 MIT 대학 예산의 90%는 펜타곤(국방부)에서 나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 서구의 사회과학, 특히 정치학이나 인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제국주의 국가나 패권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도구로 지역연구 성격이 강했다. 제국이나 패권국은 지역연구를 통해 수립된 이론과 정책을 표준적 지식으로 만들어 자국과 식민지 출신 청년들을 교육한다. 이런 표준 지식을 기반으로 제국의 세계 질서를 유지했다고 하겠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 그리고 9·11 이후에도 미국은 적국의 특성과 저항 세력 진압, 그리고 적국 민간인의 동태 파악을 위해 전투부대의 외곽에 사회과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정치, 종교, 문화를 연구시켰다. 이런 현장 조사를 토대로 미국은 제3세계 일반에 대한 이론과 거시정책을 수립했다. 19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제국의 세계 경영은 언제나 지식과 이론, 담론과 개념의 지배를 수반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과학의 주류와 지배적 담론이 된 근대화론이나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론, 신자유주의 이론, 특히 규제 완화나 민영화 만능론은 모두 이러한 제국의 세계 지식경영의 틀 속에 있다.

 

문재인, 이재명이 종북좌파라고 주장하며 적대하는 극단적 뉴라이트 인사들은 윤석열 정부의 주변이 아니라 핵심 요직들에 들어가 있다 - MBC '스트레이트'가 취재 보도한 뉴라이트 인사들 현황
 

후발국 지식인, 제국의 눈으로 앞날 고민

남미와 아시아의 후발 국가는 제국의 대학과 연구 기관에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고, 그렇게 수집된 정보는 보편 이론으로 정립되어, 거꾸로 이들 나라의 지식인과 관료에게 학습, 전파, 주입되는 표준 지식이 된다. 특히 과거의 식민지나 후발국 출신의 청년 연구자들은 제국의 대학에 유학하여, 자기가 겪은 일들이 자료가 되어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된 과정을 자각할 틈도 여유도 없이. 그들 제국의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해석하고, 그 틀 위에서 자신의 미래를 고민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포로가 된다. 박정희 정권 이후의 근대화론, 경제개발이론, 그리고 김영삼 정부 이후의 신자유주의 이론, 오늘 한국의 신우익이 주창한 식민지 근대화론도 모두가 이 제국의 지식 지배의 자장 안에 존재한다.

결국 오늘날 신우익이 주창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 거대한 지구적 지식생산과 재생산 체계 안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그냥 ‘토착 왜구’, ‘밀정’이라고 부르는 것만으론 이들의 성격과 이들이 등장하게 된 정치적 맥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돈에는 꼬리표가 달리고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부모님이 준 학비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부모님의 기대가 언제나 뒤 꼭지에 따라다니고, 고향의 기업가들이 마련한 서울의 기숙사에서 공부하거나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한 사람들은 고향 어른들의 기대를 의식한다. 국가가 특정 연구 활동을 지원할 때는 당연히 국가의 기대나 요구가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런 학비나 연구비를 받아서 교수, 학자가 되거나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해준 기관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그 빚을 갚으려 할 것이다.

 

 

일본 재단, 낙성대 학파 등 신우익에 장학금

그렇다면 미국이나 일본 등 외국 대학이나 재단의 장학금이나 연구비를 받아 국내에서 교수가 되고, 자신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 국가나 재단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지 않을까? 만약 이들 국가나 재단이 특정 연구 주제를 제시하였고, 자신이 박사 교수가 되거나 연구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면, 자신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지원자의 관심과 문제의식의 틀에 들어가지 않을까?

신우익의 대부 격인 안병직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일본 도요타(豐田) 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수행하였고, 이후 출간된 연구서 서문에서 그에 대해 감사를 표시하였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안병직은 일본인 학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의 중진자본주의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기존 시각, 식민지 반봉건주의론을 전면 수정했다. 그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기원을 과거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 정책에서 찾았다. 그의 제자이자 현 신우익의 대표 격인 이영훈 교수 역시 도요타 재단의 지원을 받아 ‘근대 조선의 수리조합 연구’를 수행한 이후, 공동연구를 구상하고 출판을 지원한 재단 측의 인사가 “관대하면서도 헌신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낙성대 학파의 경제학자들 대부분 이런 식으로 일본 유학 이후 과거의 ’좌파‘ 이론을 버렸다.

 

일본에서 출간된 이영훈의 또다른 책
 

과거 영국이나 미국도 후발국 청년들에게 그렇게 했지만, 일본의 국가나 기업은 왜 한국 학자들을 지원했을까? 왜 일본은 한국 경제발전이라는 연구 주제를 일본 학자들과 공동으로 연구하도록 지원했을까? 결국 일본이 ‘한국 경제발전’이라는 연구 주제를 내걸고 그러한 주제를 연구하는 한국 학자를 육성하려 한 것은 당연히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일본의 국가와 자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원래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라는 조직은 단 1원도 손해나는 곳에는 투자하지 않는 법이다. 미국의 포드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이 서유럽과 제3세계에 연구기관을 설립하고 연구비를 지원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김태효 하나 키워 천·만배 남는 장사?

냉전기 미국의 연구지원은 대체로 거시적인 미국의 국가 이익, 즉 대소련·대중국 견제를 위한 지적 보루, 이데올로기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정보 전쟁, 새로운 자본주의 세계 질서 구축의 일환이었다. 과거 동아시아나 만주에서 제국 경영의 경험이 있는 일본도 영미의 전례를 따랐다.

과거 일본의 전쟁범죄자인 사사카와 료이치의 아들인 사사카와 요헤이(笹川 陽平)가 주도한 사사카와 평화재단이 연세대 등에 아시아 연구기금의 명목으로 지원한 것도 그렇게 봐야 한다. 과거 고려대의 아세아문제연구소가 출간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서울대 인구및발전문제연구소가 행한 일련의 한국의 근대화 연구 작업 등도 겉으로는 민간 재단의 지원을 받은 것이었으나, 배후에는 미 정보국이나 국무성이 자금 세탁 등의 방식으로 개입된 의혹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6일 “강제징용 판결 문제의 해법을 발표한 건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일본 정부가 미래 지향적인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을 평가한다”고 밝혔다. KTV
 

초기 한국의 여러 대학의 연구소들이 이런 지원을 받아 성취한 연구 성과가 한국 현대사와 경제발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나, 지원한 미국이나 일본의 정치 경제적 목적을 생각하면, 그런 지원을 통해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유도하고, 어떤 유형의 한국 지식인을 길러낼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려가 깔려 있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일본 정부와 재단의 지원을 받는 학자들이 모두 신우익, 신친일파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원을 한 측에서 본다면 열 명 중 한두 명이라도 그 나라의 영향력 있는 지식인, 핵심적인 관료나 정치가가 되어 자국의 이익, 자국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현지 대리인’ 역할을 한다면, ‘투자’한 액수의 천배 만배를 회수하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미국의 피바디 대학은 한국의 청년 교육학도들을 훈련시켜 한국 교육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도록 했고, 그들이 이후 한국의 교사 양성, 교과서 집필을 관장하여 미국의 대한 정책을 원활하게 만드는 친미적인 여론 형성, 자유주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려 한 것이 아닐까? 제국의 이런 연구지원 정책이야말로 장기적으로 ‘남는 장사’임에 틀림없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 김태효가 용산 대통령실에 들어가 현재의 친일 일변도의 대일정책을 집행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입장에서 보면 천배 만배 남는 장사가 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천소라 한국개발연구원(KDI) 경제전망실 전망총괄이 11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3년 상반기 KDI 경제전망을 발표하고 있다. 오른쪽은 정규철 경제전망실장. 2023.5.11. [연합]
 

신우익 기승 근현대사보다 사회과학 더 심각[

신우익이 본격적으로 세력화된 이명박 정부 시기의 교과서 포럼이나 한국 근현대사연구회의 활동은 한국 학계 전체의 판도에서는 그다지 위협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학문’을 내걸고 있으나 주류 보수세력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으며 매우 정치화되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1990년대 말 일본의 극우파가 자신들의 지속적인 집권을 위해 ‘자유주의’ 사관을 내걸고 그것을 반영한 교과서 발행을 위한 일에 많은 물적 자원을 투입했듯이, 한국의 신우익도 한국의 권력과 자본의 후원을 받아 ‘이승만 국부론’ ‘박정희 찬양’, 그리고 ‘1948년 건국론’을 띄우기 시작했다. 결국 윤석열 집권으로 그들은 정치의 전면에 부상했다.

그러나 사실 사회과학 영역은 근현대사 분야보다 더 중요하다. 특히 시장주의를 종교처럼 받드는 경제학자들은 신우익 집단처럼 요란하게 등장하지 않아도 외환위기 이후, 아니 1990년대부터 한국 주요 대학의 교수진, 정부 국책연구소 연구진의 자리를 독점하여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으로 사회를 획일화하는 기둥 역할을 했다.

서울대. 고대. 연대 등 주요 대학의 교수진과 한국개발원(KDI) 등 국책연구소, 핵심 경제부처는 거의 대부분이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미국 경제학 박사들로 채워졌다. ‘개발주의’ 시대가 오래전에 끝났는데 왜 ‘한국개발원’이 여전히 건재한지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한국개발’을 연구한다는 기관이 왜 100% 미국 유수 대학의 박사들로만 채워지는지는 더 이해하기 어렵다.

미국 대학의 훈련 과정, 교수진의 학문적 우수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인 점도 있지만, 우리 자체의 독특한 문제가 있고, 그것은 외국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요 대학의 경제학자들, 국책연구소의 경제학 박사들이 과거 한국의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에 어떤 경고 사인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경제문제, 특히 양극화와 불평등, 그리고 산업전환의 큰 위기 상황에서 어떤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비가 내린 2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열린 제76회 후기 학위수여식을 마친 졸업생들이 교문 인근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2022.8.29. [연합]
 

한국 청년들 ‘누구 돈’으로 ‘누구 위해’ 연구?

그렇다면 한국의 국가, 대학,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각종 연구소는 과연 한국의 국가 이익, 국민의 이익을 위한 연구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그리고 사명감을 지닌 연구진을 육성하고 있는가? 사실 국가주의는 낡은 가치이지만 19세기 이후 어느 나라도 국가의 기간산업, 안보, 국민의 기본적 삶에 관한 문제를 사기업의 지원에 맡긴 적이 없다. 기초연구나 장기 지원은 오직 국가만이 할 수 있다.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국가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 구축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국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주권 국가로 구성된 세계 질서를 부인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서 국립대학이나 국책연구소는 일차적으로는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지식인을 양성해야 하고, 국가의 미래, 국가의 안보와 지속가능성, 다수자인 국민의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임무가 기본이다. 부자 한국은 어떤가?

오늘 이 신우익의 정치화는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학의 대학원 박사과정의 공동화, 대학연구소의 사실상의 연구기능의 취약성, 정부의 임기응변적 대학 정책, 학문 정책의 부재, 장기적인 기초분야 연구지원 사업의 필요성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한 경제부처나 교육부 관료, 그리고 야당 정치세력의 학문과 지식인 정책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신우익의 정치화, 국민의 상식을 비웃는 그들의 도착적인 일제 식민지 지배 미화론을 보면서 분노하거나 한탄하기 이전에 누가 이런 논리를 갖는 사학자나 경제학자들을 길러냈는가를 물어야 한다. 즉 우리는 지금 연구자의 길을 가려는 한국의 청년들이 ‘누구 돈’으로 ‘어떤 주제의 연구’를 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지식 수입국, 연구자 수입국의 처지에 머물면서, 강대국의 이해를 마치 자신의 것 인양 받아들이는 ‘마름’형 지식인만을 만들어낼 것인가?

기업 등 민간 연구소의 역할도 중요하다. 한국 기업 중 SK(과거의 선경)처럼 미래지향적 엘리트 양성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한 예외적인 경우가 있지만, 이미 세계적 반열에 올라선 한국의 대기업들이 미국의 포드, 록펠러 재단, 일본의 도요타 재단 정도의 장기적 지식투자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시민사회의 취약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대학과 국책 연구기관의 역할을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민족 사학, 민족 사회과학을 제창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나 민간 모든 영역에서 한국은 국가나 민족,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미래는 물론 더 나아가 지구사회와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는 지식인을 양성할 수 있는 고등교육, 연구 지원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1948년 건국론, 식민지 근대화론 따위를 둘러싸고 한국인들끼리 치고받는 것은 너무나 한심하고 창피한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