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전 학원 침탈에 항의한 교수

고문치사 뒤 간첩죄 덮어씌웠던 중정

그 후예가 진실화해위 조사국장이라니

마스크 쓰고 국회 출석해 "매국노 잡았다"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2024년 국회 국정감사 중 인기 유튜브 방송의 실시간 동접수는 ‘속된 말로’ 죽을 쒔다고 한다. 법사위나 과방위 등 국민 관심사가 집중된 상임위 중계가 재미있어서 관심이 온통 그쪽으로 쏠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국감에서는 앞으로 여의도 정치권에 전설처럼 남을 이야기가 많이 생산되었다.

마스크로 변장한 국정원 출신 진실화해위 조사 책임자

나도 그 중에 하나를 꼽자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 출석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1국장 황인수 사례다. 그는 28년 간 국가정보원에서 대공수사 업무를 했으며 마지막 직위는 대공수사처장(3급)이었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진실을 밝히는 진실화해위 조사 책임자로 ‘그런 사람’을 임명한 것이다.

그러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가 조사국장으로 온 후 내부의 혼란은 극심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기행은 국회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국회 행안위에서 진실화해위 위원장 등을 불렀는데 기관 증인으로 함께 출석하면서 얼굴을 마스크로 변장한 채 나타난 것이다.

야당은 물론이고 국힘당 소속 여당의원까지 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티며 퇴장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에도 국회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출석했다. 의도적 도발이다. 논쟁이 되자 그는 “28년간 매국노를 찾아내 처벌하는 대공업무에 매진해 왔기 때문에 얼굴 공개 시 타인이 피해를 볼 수 있다”며 마스크를 고수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의원들이 납득할 리 없었다.

방송을 통해 그 장면을 본 나 역시 어처구니 없었다. ‘매국노’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그의 정신세계가 너무나 특이했다. 국어사전에서 ‘매국노’는 ‘사리사욕을 위하여 남의 나라 앞잡이가 되어 자기 나라에 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국가정보원은 정말 그런 매국노만 찾아 엄격히 처벌해 온 곳인가?

 

'얼굴 비공개'로 논란을 빚어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황인수 조사 1국장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 얼굴 공개 요구를 거부하며 주민등록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왼쪽 사진).이에 신정훈 위원장이 인터넷 등에 공개된 황 국장의 사진을 들어 보이며 마스크를 벗지 않는 것은 국회를 무시하는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다(오른쪽 사진) . 2024.10.10. 연합
 

매국노 찾아낸 것 아니라 고문으로 간첩 조작했던 중정

그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국정원의 원조는 ‘중앙정보부’다. 박정희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중앙정보부를 만든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독재에 반대하는 세력을 고문으로 조작하여 간첩을 만들었고, 감옥으로 보냈으며 때로는 죽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희생자가 1974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8인이었다. 결국 재심을 통해 이 모든 것이 중정의 고문으로 철저히 조작된 사건임이 밝혀졌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치하에서 숱하게 발표된 1970, 80년대 대부분의 간첩사건이 중정과 안기부의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이 과거사위 조사와 재심으로 드러났다.

그중에 정말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만 51년 전, 중앙정보부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다. 그는 1973년 10월 16일 스스로 걸어서 당시 서울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에 출두했다. 중정으로부터 ‘협조’ 요청을 받고 간단한 조사후 금방 나올 줄 알고 간 길이 마지막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가 출두하고 사흘 후인 19일 새벽, 중정은 조사 중 자신이 간첩임을 자백한 최 교수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7층 화장실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려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사망 당시 마흔 세 살. 스위스 취리히대학 유학파 출신에 독일 쾰른대학에서 채 서른이 되기 전 법학박사를 취득한 촉망받던 서울 법대 정교수였다. 그런 최 교수가 무엇이 부족해서 간첩 행위를 하였을까.

학생 탄압 항의한 서울대 법대 교수를 간첩 만들려던 중정

최 교수가 중정으로 연행된 진실은 따로 있었다. 모범적인 학자이자 자상한 가장이었던 최 교수의 비극이 시작된 날은 1973년 10월 2일이었다. 이날 서울대 학생들은 박정희 유신독재 선포 이후 처음으로 유신 반대 시위를 격렬하게 벌였다. 이 시위로 학생과 교직원 등이 대거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한다.

이에 최 교수는 중정2국 소속의 김 아무개 서울대 담당관에게 “학원에 기관원이 출입하고 학생 교수들을 연행해서 고문하고 핍박하는 것은 나치 히틀러의 게슈타포나 하는 짓”이라고 항의했다. 이어 교수회의에서는 “총장이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도 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유신독재가 서슬퍼런 그 시절에 서울대 학생과장이었던 최 교수가 박정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한 것이 중정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에 최 교수를 간첩으로 엮고자 고문을 하다가 그만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중정은 이런 잘못을 덮고자 ‘죽기 전 스스로 자백했다’며 최 교수를 간첩단 일원에 포함시켜 발표한다.

결국 촉망받던 법학자이며 정의로운 스승이었던 최 교수가 중정에 의해 간첩이라는 ‘매국노’로 전락했으니, 남은 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이 땅에서의 잔인한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늦게나마 진실이 밝혀진 것은 지난 2002년이었다.

2002년 뒤늦게 밝혀진 진실, 끝까지 부인한 가해 요원들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최 교수의 유족이 낸 진정을 받아 조사한 결과, ‘최 교수는 중정의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간첩 자백을 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최 교수가 간첩의 일원이었다고 중정이 발표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역시 별도로 조사한 결과, 완전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중정의 가해자들은 사실을 강력 부인했다.

“제 생명을 걸고 천지신명께 맹세코, 잠 안 재운 것 빼고는 최 교수를 고문도 죽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 어머니가 ‘남의 눈에 눈물 나오게 하면 너는 피눈물 흘리게 되니 악행하지 말라’ 했다며 “빰 한 대 때린 적 없다”고 어머니까지 팔았다고 한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양심도, 천지신명도, 심지어 자기 어머니도 필요하면 팔아먹는 자들인 것이다.

가해자를 제외한 다른 중정 직원의 진술은 명확했다. 최 교수가 무자비한 구타 고문으로 온 몸에 멍이 들어 제대로 걷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가해자들이 야전 침대용 각목으로 최 교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걸 직접 봤다는 목격 증언도 있었다. 그런 몸으로 가해자들이 밀착 감시하는 짧은 상황에 7층 창문에서 뛰어 내렸다는 진술은 진실에 부합하지 않았다.

2006년 2월 16일, 마침내 법원도 ‘법의 이름으로’ 최 교수의 사인 조작을 인정하고 유족에 대한 거액의 국가 배상을 선고한다. 서울고법 민사5부(조용호 부장판사)는 이날 “최종길은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고문 등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했거나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이를 피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망했거나, 또는 의식불명 상태의 그를 사망한 것으로 오인한 수사관들이 건물 밖으로 던짐으로써 사망한 사실이 인정되고 중앙정보부가 이를 은폐하기 위해 허위 발표했다”고 판결했다.

 

대규모 간첩단 적발했다는 중정의 발표를 기사화한 1973년 10월 25일치 신문. 최종길 교수 사진에 '사망'이라고 표기돼 있다. 
 

매국노가 ‘가짜 애국자’를 자처하는 불행한 시대

지난 10월 19일은 최종길 교수의 기일이었다. 그날 경기도 마석모란공원 최 교수 묘역에서는 70여 명의 각계 인사가 그의 51주기를 추모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함세웅 신부가 미사를 집전했고 안경환 전 국가인권위원장이 고인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담아 회고했다. 엄혹했던 당시 시대상을 느낄 수 있는 고백이었다.

“(…) 지금으로부터 51년 전인 1973년 10월 19일, 지금은 ‘대학로’로 불리는 동숭동에 자리했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최종길 교수께서, 당시에 국민이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전율하던 중앙정보부의 모진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부기관은 최 교수가 ‘간첩’ 혐의로 수사 받다 죄상이 드러나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거짓에 대들지 못했습니다. 당시 대학원생이던 저는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학교는 온통 어두운 침묵 속에 무력했습니다. 스승을 잃은 학생들은 황망한 분노를 행동으로 결집할 수 없었고, 동료를 잃은 교수들은 굳은 표정과 비탄의 침묵으로 추도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간첩’과 ‘자살’ 이라는 치명적인 낙인을 거부하며 진짜 사인을 규명하자며 용감하게 나섰던 몇몇 젊은 교수들이 그 일로 인해 차례차례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초를 당했습니다. 유족의 접촉도, 죽음을 애도하는 사적 모임조차도 당국의 엄중한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도서관 앞에 ‘정의의 종’을 내걸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탐구 연마하던 대학이 독재정부가 휘두른 무도한 폭력 앞에 교수를 희생양으로 바쳤다는 양심의 가책을 안은 채 모두가 침묵의 공모자로 살도록 강요 당했습니다. (…)”

이런 중정에서,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국정원에서 종사하던 자를 ‘다른 곳도 아닌’ 진실화해위 조사국장으로 채용한 것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진짜 매국노는 죄 없는 이를 간첩으로 만들어 죽임으로서, 국민이 국가를 불신하게 만든 자들이다. 그래서 나는 독재 권력의 손과 발 역할을 하던 정보기관의 수구들을 ‘매국노’라 부르겠다. 그런 매국노가 ‘가짜 애국자를 자처하는’ 불행한 윤석열 시대다.     < 민들레 고상만 인권운동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