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탄핵 뒤 황교안 체제-극우 결탁
2020년 총선 패배로 ‘일시적 거리두기’
‘윤석열 포퓰리즘’ 실패에 극우 재활성화
2024년 총선 참패, 내란·탄핵 거치며 폭주

국민의힘은 자유민주주의를 정체의 기본원리로 삼는 대한민국 집권 여당이다. 군사정권에 뿌리를 둔 권위주의 세력과 영남 기반 자유주의 세력이 연합한 민주자유당(1990~1995년)을 계승한다. 이념적으로 반공·국가주의 성향을 띠면서 경제적으로는 친대기업 노선을 걸었다. ‘북한 변수’의 영향으로 매카시즘적 성향이 도드라지는 시기도 있었지만 이 당을 ‘극우’로 규정하는 이는 드물었다. 권력분립과 법치, 개인의 자유 보장이 핵심인 현행 헌정질서를 부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탈을 시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12·3 내란을 거치며 급변했다. 많은 이들이 국민의힘을 ‘극우 정당’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군을 동원한 헌정 파괴 시도를 옹호하고,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권위를 흔들면서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잠복해 있던 배외주의(반중국)와 소수자 혐오를 키우는 전형적 극우 정당의 행태를 보인 탓이다.

전조
모든 것을 12·3 내란이라는 ‘정치적 급변사태’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국민의힘 극우화’의 기운이 문재인 정부 출범(2017년)을 전후로 싹텄다고 본다. 2016년 총선 패배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새누리당 분당을 거치며 보수정당이 원내 소수파가 되고, 남북 관계의 급속한 해빙과 시민사회의 차별금지법 제정 움직임 등에 자극받은 반공·반북, 극우 개신교 집단이 ‘광장에 결집된 힘’을 등에 업고 정치적 세력화를 도모하던 시기다.
변곡점은 2019년 자유한국당 황교안 체제의 등장이었다. 이 체제는 문재인 집권 중반기, ‘보수 몰락’이라는 위기의식 속에 주변부에 머물던 극단주의 세력이 규모와 영향력을 키우며 주류 보수정당을 압박해가는 흐름 속에 탄생했다. 실제 자유한국당이 장외투쟁에 본격 돌입한 2019~2020년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에 취임한 전광훈 목사가 태극기 부대와 함께 전국조직을 만들어 ‘문재인 하야 서명’을 받기 시작한 시기와 겹친다. 2019년 10월부터는 자유한국당 전현직 의원들도 이 흐름에 합류하는데, 당시 전광훈 목사 집회에서 마이크를 쥔 정치인 중에는 김진태 강원지사와 오세훈 서울시장도 있었다.
같은 달 25일 전광훈 세력의 광화문 집회에는 황교안 대표가 의원들을 이끌고 참석했다. 그해 12월16일 자유한국당이 국회에서 주최한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 집회’에는 극우 개신교 세력이 대거 참여해 “목숨 걸고 자유대한민국을 지키자”는 황교안 대표의 발언에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했다.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일부 참가자가 국회 본관 난입을 시도해 국회 경비대와 충돌했다.

거리두기와 재결합
황교안 체제에서 시작된 ‘극우와의 동거’는 결과가 처참했다. 미래통합당으로 당명을 바꿔 치른 2020년 총선에서 10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보수정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였다. 황교안 체제가 1년2개월 만에 막을 내리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가 들어섰다.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전광훈 목사와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다”며 ‘극우 손절’에 착수했고, 주호영 당시 원내대표는 “사회에서 소위 ‘극우’라고 하는 분들, 당은 우리와 다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결별’이 아닌 ‘일시적 거리두기’에 불과했다.
‘극우화’의 새로운 국면은 윤석열의 대선 도전과 함께 시작됐다. 전광훈 목사는 2022년 1월 교회 설교에서 “윤석열을 통해 정권교체 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이 있으면 가져와 보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시기 윤석열 후보 역시 ‘우파 포퓰리스트’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 윤석열이 가장 공을 들인 작업은 ‘공정과 상식 회복’이란 슬로건 아래 ‘약탈세력’과 ‘국민’으로 사회를 갈라치는 일이었다.
윤석열식 포퓰리즘에서 ‘약탈세력’은 리버럴 성향의 86세대 정치인과 민주노총으로 상징되는 정규직 노조, 페미니스트, 진보시민단체, 성소수자와 이주노동자 등 평소 윤석열과 주변 세력이 강한 적대감을 표출해온 집단이었다. 그런 다음 이 약탈세력을 제외한 모든 이를 ‘국민’으로 호명해 제 편으로 끌어모았다. ‘국민’의 핵심은 종합부동산세와 고액 재산세 납부자, 극우 노인층, 대형 교회 신도, 20~30대 남성, 전통적 보수 유권자, 양극화로 직격탄을 맞은 취약계층이었다. 결과는 0.73%포인트 격차의 초박빙 승리였다.

잠복과 재활성화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이 ‘집권 전략’으로는 효과적이었지만, ‘통치’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기존 질서를 비판하며 대항 세력을 모으는 것과 국가 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의힘의 극우화는 집권 1년차까지는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시기 국민의힘은 전광훈 세력을 경계하며 그들과 당 내부의 유착 움직임을 과감히 차단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2023년 3월 전광훈 목사 집회에 참석한 김재원 최고위원이 “5·18 정신의 헌법전문 수록에 반대한다”고 했다가 당 윤리위원회의 징계를 받은 게 대표적이다. 같은 시기 황교안 전 대표는 전광훈 목사의 공천 청탁 사실을 폭로하며 “(전광훈 세력을) 당에서 축출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김재원 전 의원은 국민의힘 1·2·3기 지도부 선거에서 연이어 최고위원에 뽑히며 당의 징계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여기엔 2017년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와 2019년 극우-자유한국당 밀착, 2022년 대선을 거치며 국민의힘에 대거 입당한 극우 개신교와 태극기 세력의 조직화된 움직임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 만큼 잠복기는 1년을 채 넘기기 어려웠다.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전쟁의 언어’로 가득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 노동계를 “공산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세력들”로 규정했다. 그해 경축사의 말들은 “일거에 척결” “처단한다” 등 1년3개월 뒤 비상계엄 담화와 포고문에 등장할 ‘절멸의 언어’의 예고편이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집권 초엔 공정을 강조하며 민생을 챙기겠다더니, 통치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야당을 탓하며 이념적 내전을 선포한 것”이라고 했다. 지지율 하락과 거대 야당과의 갈등, 그로 인한 국정 교착이 장기화하자 잠복했던 극우 바이러스가 재활성화된 것이다.

참패와 혼돈
극우화가 윤석열 대통령 탓만은 아니었다. 극단으로 치닫는 대통령의 생각과 행동을 집권 여당이 제어하지 못한 게 뼈아팠다. 국민의힘은 오히려 극우화에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는 쪽을 택했는데, “ 자유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단호히 배격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했던 2023년 8·15 경축사에 대한 국민의힘 논평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데는 대선과 당직 선거를 거치며 당 전체가 친윤석열계 일색으로 바뀐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윤 대통령과 대립하던 이준석 대표가 2022년 7월 당대표에서 축출됐고, 2023년 3월 전당대회 땐 지지율 1위를 달리던 나경원 의원이 대통령실과 친윤계의 압박 속에 당권 레이스에서 강제 하차했다. 이런 기형적 ‘당정일체’ 시스템 아래서 당의 모든 의사결정은 윤석열·김건희의 ‘부부 의지’에 좌우됐다.
결과는 또 한번의 총선 참패였다. 지난해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는 데 그쳤는데, 이 가운데 부산·울산·경남이 34석, 대구·경북이 25석으로 영남 지역구 의원이 당 전체 의석의 54.6%를 채웠다. 지병근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원내에 진입한 의원이 영남권에 편중된 것은 정치적으로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고 했다. 국민의 평균적 요구 대신 영남권 강성 지지층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면서 당의 극우화를 제어할 역량 자체가 거세돼 버렸다는 것이다.

내란과 폭주
국민의힘의 극우화는 일본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가 분석한 ‘전전(戰前) 일본의 통치 메커니즘’과 비슷했다. 여기서 권력은 ‘천황’이라는 절대적 권위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분배됐는데, 이 시스템의 특징은 권력을 분배받아 행사하는 주체들이 권력 행사의 정당성을 ‘자기 내부’에 갖기보다 ‘중심(천황)과의 거리(근접성)’에 의존한다는 데 있었다.
국민의힘 역시 각 주체들이 행사하는 권력의 크기는 중심(윤석열 부부)과의 근접도에 비례했다. 문제는 이 시스템에선 중심이 사라지거나 약화될 경우 각 단계의 권력이 중심을 추종해온 하부로부터의 압력에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게 된다는 데 있었다. 12·3 내란 뒤 국민의힘의 모습이 그랬다. ‘윤석열 없는 친윤계’는 사라진 권위와 권력을 안으로부터 새롭게 만들어 채워나가기보다, 폭민화된 윤석열 추종세력에 올라타 붕괴 위기의 통치 레짐을 지켜나가려고 했다. 그 결과는 ‘극우의 주류화’였다.
일련의 과정은 12·3 내란 이후 정국의 전개 상황을 살피면 명확해진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12·3 내란 사태의 전개를 5개의 국면으로 정리하는데, 1국면은 12월3일 집권세력의 친위 쿠데타 시도와 국회·시민의 방어행동이 펼쳐진 시기다. 2국면은 계엄 해제 뒤 민주주의 회복에 대한 최대 합의가 일시적으로 형성된 시기, 3국면은 국회의 탄핵으로 제도적 권력 자원을 상실한 윤석열이 계엄의 정당성을 강변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헌법기관 공격을 선동하는 단계다. 4국면은 극우의 대규모 결집과 법원 폭동 등 극우 테러가 본격화하는 시기, 5국면은 국민의힘이 극우세력의 폭력 선동에 동참함으로써 파시즘 경향을 강화하는 단계다.

파국이냐 회생이냐
12·3 내란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공고하지 않을뿐더러,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압살하려는 집단이 한국 사회에 상당 규모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극우 사회세력과 보수 정치세력의 동맹이 심각한 단계까지 진전됐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충격을 안겼는데, 역설적으로 이것은 한국 보수정당의 구조적·이념적 취약성을 입증하는 사례이기도 했다.
문제는 지금처럼 보수 정치세력과 극우 사회세력의 동맹이 유지되면서 집권에까지 이를 경우 한국 사회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대파국’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을 막는 길은 보수 정치세력을 극우 사회집단으로부터 격리하는 것, 국민의힘의 ‘보수정당화’다. 이 목표를 국민의힘의 의지만으로 성취하기란 무망한 일이다. 정당의 체질 혁신은 내부의 자구노력과 경쟁 정치세력의 충격, 사회의 집요한 압력이 합쳐질 때 완수될 수 있음을 세계 정당사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 한겨레 이세영 신민정 기자 >
“헌재 쳐부수자”는 국힘 의원…브레이크 없는 ‘극우화 폭주’

국민의힘 의원들의 ‘헌정질서 부정’이 도를 넘고 있다.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를 앞두고 격화된 헌법재판소에 대한 폄훼와 흔들기가 급기야 ‘헌재 파괴 선동’으로까지 치달았다. 조기대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정제되지 않은 극단적인 발언과 행동이 줄어들 것이란 세간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극우화’의 외길을 따라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모습이다.
서천호 국민의힘 의원은 지난 1일 보수성향 기독교단체인 세이브코리아가 주최한 여의도 집회에서 “불법과 파행을 자행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쳐부수자”고 말했다. 국민의힘 현역 의원들이 탄핵을 반대하는 보수 집회에 참석해 극우적 주장에 동조하는 발언을 한 적은 있지만, 선관위 같은 독립적 헌법기관과 헌재라는 최고 사법기관에 겨냥해 “때려 부숴야 한다” “쳐부수자”고 선동한 건 처음이다. 이 자리에는 김기현·나경원·추경호 등 국민의힘 의원 37명과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김성태 전 원내대표 등 원외 인사들이 참석했다.
경찰 출신인 서 의원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1년 부산지방경찰청장으로 재직할 당시 ‘인터넷 댓글 여론조작’ 사건에 연루돼 2019년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형이 확정됐다. 당시 사건을 수사한 이는 윤석열 대통령이었지만, 22대 총선을 앞두고 ‘사면’ 조치로 서 의원에게 공천받을 길을 터준 것도 윤 대통령이었다.
같은 날 전광훈씨가 이끄는 대한민국바로세우기국민운동본부의 광화문 집회에서는 “불법 탄핵 재판을 주도한 문형배, 이미선, 정계선을 즉각 처단하자”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옥중 편지가 낭독됐다. ‘헌법재판관 처단’을 선동하는 내란 주범의 극단 발언이 여과 없이 전파된 것이다. 이 집회에는 박대출·강승규·나경원 의원 등 국민의힘 의원들이 함께했다.
당 지도부는 서 의원 등의 발언에 대해 ‘개인적 입장’이란 공식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번엔 너무 나갔다. 당 차원의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당 지도부 핵심 인사는 “(여당 의원이) 헌재 등을 쳐부수자고 한 것은 선을 한참 넘은 발언이다. 중도층 지지가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의원들 발언은 거꾸로 가고 있다. 당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권성동 원내대표는 삼일절 기념식이 끝난 뒤 기자들과 만나 “(집회에) 가고 안 가고는 각자가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으로 했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이 극우의 미몽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황정아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국회의원이 오히려 극렬 지지층들에 탄핵 불복을 선동하고, 폭동을 사주하고 나섰다”고 비판하며 ‘헌법재판소를 때려 부수자’고 주장한 서천호 의원의 즉각적인 제명을 요구했다. < 서영지 고한솔 기자 >
‘비상계엄 근거’ 부정선거론 “증거 없다”면서…국힘 당원들 ‘이재명 탓’
국민의힘 당원 3인의 ‘계엄 지지’ 이유

서울에서 임상심리사로 일하는 국민의힘의 40대 여성 당원 이아무개씨는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야당이 줄탄핵에 예산삭감으로 정부를 마비시키지 않았나?”라며 “진짜 내란범이 누구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7~10일 한겨레와 인터뷰한 다른 국민의힘 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거대 야당, 민주당의 횡포”를 지적하며, “윤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처음부터 ‘비상계엄’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2023년 국민의힘 당원에 가입했다는 윤성열(35)씨는 지난해 12월3일 전까지는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탄핵반대 청년연대’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다. 윤씨는 비상계엄 선포 당일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이내 “국정을 마비시키고 대한민국을 전복시키려는 반국가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비상계엄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응원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 말처럼 ‘반국가세력’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비상계엄 선포였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당원이 된지 10년이 훌쩍 넘었고, 대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60대 유아무개씨도 비슷했다. 그는 처음 계엄령 발동 소식을 접했을 때 “간첩을 잡았나 싶었다”고 한다. 국내 정치 상황으로 계엄을 선포하리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후 대통령 담화를 듣고 “그 심정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는 “윤 대통령을 평소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투표로 뽑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며 “야당이 줄탄핵에 정부 운영에도 사사건건 비협조적이지 않았느냐. 나였어도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한덕수 총리도 탄핵하고, 걸핏하면 탄핵으로 겁박하고 있다. 벌써 여당이 된 것처럼 그러는데,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라도 탄핵에 반대한다”고 했다.
앞서 인용한 40대 당원 이씨는 “탄핵 문제는 ‘체제의 전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탄핵이 인용되면 국가 성장을 방해하는 세력이 더 활개를 치고, 정말 나라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60대 윤씨 역시 “행정부 운영을 마비시킬 정도의 줄탄핵과 예산 삭감이 있었지 않았나. 대통령이 국정을 수행하는데 민주당이 무조건적으로 방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비상계엄은 대통령 입장에선 당연한 통치행위”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향해선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유씨는 “앞뒤 말이 다르다. 대통령이 되면 또다시 반대 세력을 숙청하려 할 건데, 나라가 계속 시끄럽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국회도 민주당이 장악하고, 대통령도 이 대표가 하면 정말 나라를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씨는 “이재명처럼 거짓말하고 앞뒤가 다른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작은 사업도 함께할 수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의 불신과 적대감이 야당뿐 아니라 헌법재판소와 법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헌법기관으로까지 향해 있다는 점이었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12·3 비상계엄 이후 지속적으로 전파해온 메시지들의 효과로 보였다.
윤씨는 “공수처는 권한도 없는 수사를 하며 대통령을 불법 체포하려 했고, 법원 역시 수사 권한이 없는데도 영장을 발부했다”며 “헌재는 재판 진행 과정이나, 재판관들의 성향을 보면 공정한 법 집행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편향성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이씨는 ‘서부지법 난동 사태’에 대해 “난동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극우라고 프레임을 씌우는 건 맞지 않은 것 같다”며 “나라를 위해, 애국심으로 낸 목소리를 과잉 진압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했다. 유씨는 “입장 바꿔놓고 내가 재판을 받는데, 판사가 저쪽 편이라는 생각이 들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탄핵반대 세력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에 대해선 세 사람 모두 “구체적 증거가 없다”며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의혹이 커진 게 사실이니, 문제를 확인하고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고 입을 모았다. < 손현수 기자 >
‘권력형 개소리’…계엄 지지 극우의 파시즘 선동 [.txt]
보수우파와 달리 민주주의 ·헌정질서 파괴
친일·반공에 뿌리…12·3 계엄 올라타 급팽창
‘정변 불능’ 믿음 뒤엎고 민주정 취약성 일깨워

2024년 12월3일 밤, 윤석열 대통령(직무 정지)의 반헌법적 비상계엄이 시민과 국회의 긴박한 대응으로 좌절된 이후 한국 사회가 요동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심리적 내전’이란 말이 나올 만큼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한국 극우세력의 조직적 결집과 준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계엄(戒嚴)’은 한자 말로만 보면 그 본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계엄은 군대가 행정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행사하며 국민 기본권을 제약하는 군사 통치다. 영어로 ‘계엄령’을 뜻하는 ‘martial law’는 “일반법의 정지를 포함하는 군정 체제(military government, involving the suspension of ordinary law,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다.
“12·3 이후 우리 사회는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오게 됐다”, “지금 상황은 극우의 차원도 넘어선 파시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보수집단의 극우화에 주목해온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의 진단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 극우는 민주화 이후 ‘조직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집단행동의 대중화’ 단계를 거쳤고, 12·3 계엄 사태 이후에는 내란에 동참(‘반란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석열 지지자들의 행태는 학자들이 설명하는 ‘극우’ 개념과 잘 맞아 떨어진다.
극우는 보수 우파와 어떻게 다른가? 그에 앞서, 좌파와 우파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그 핵심적 차이는 불평등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극우와 포퓰리즘 연구의 권위자인 카스 무데(미국 조지아대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익 성향은 불평등이 인간 사회에서 자연스럽고 긍정적 현상이므로 정부는 그대로 놔둬야 한다고 보는 반면, 좌익 성향은 (불평등이) 인위적·부정적 현상이므로 정부가 적극적으로 없애려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보수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주류 우익이 아닌, 자유민주주의에 적대적인 ‘반체제 성향’의 우익을 나는 ‘극우’라고 부른다.”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위즈덤하우스, 2021)

극우는 단순한 보수주의를 넘어선다. 극우의 사전적 의미는 “극단적으로 보수주의적이거나 국수주의적인 성향. 또는 그 성향을 가진 사람이나 세력”(표준국어대사전)이다. 학계에서는 단순 우파와 극우의 본질적 차이를 헌정 체제의 인정 여부로 본다. 카스 무데는 극우를 다시 ‘급진 우익’(radical right)과 ‘극단 우익’(extreme right)으로 구별했다.
“극단 우익은 민주주의의 본질인 국민 주권과 다수 통치를 거부한다. 대표적 예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쥐여준 파시즘이다.”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극우는 배타적 국수주의, 권위주의적 성향, 사회적 소수자 혐오, 가짜뉴스와 음모론 의존, 포퓰리즘 성향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한국 극우의 뿌리는 해방 이후 친일파 잔존 세력과 냉전·권위주의 정권 시대의 반공 이념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이후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 지지 세력이 보수층으로 자리 잡았고, 200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극우 세력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브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했고, 문재인 정부 시기 극렬한 반정부 운동으로 영향력을 키웠다.
2024년 12·3 계엄 사태는 한국 극우 성장사의 결정적 변곡점이 됐다. 윤석열과 그의 지지자들은 뜬금없는 계엄의 명분을 국회 다수당인 야당(민주당)과 반국가세력, 북한과 중국 간첩, 그리고 부정선거 탓으로 돌렸다. 근거는 없으나 믿음이 넘쳤고, 부족한 설득력을 선동으로 채웠다.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괴물이 됐다. 지금 대한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 (…) 패악질을 일삼은 망국의 원흉 반국가세력을 반드시 척결하고 국가를 정상화시키겠다.”(윤석열, 2024년 12·3 계엄 선포)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는 저들(민주당)이야말로 암흑의 세력, 어둠의 세력, 내란세력.”(윤상현 국민의힘 의원, 2024년 12월28일 광화문 집회)
“비상계엄 당일 계엄군은 미군과 공동작전으로 선거연수원을 급습해 중국 국적자 99명의 신병을 확보했다. (…) 체포된 중국인 간첩들은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로 이송됐다.”(1월16일, 극우 인터넷매체 스카이데일리)
이러한 억지 주장과 극우 인터넷 매체의 가짜뉴스가 결합하면서, 확증편향이 강화되고, 극우 세력의 집단적 결속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내부에서 부풀어 오른 ‘열정’은 외부의 ‘적’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으로 터져 나왔다.
“진실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멸은 기성 언론이 거짓되거나 편향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며 그 사람만은 ‘진짜 사실’을 밝히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지지자들은 그의 거짓말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를 믿기 때문에 그를 믿는다.” ―‘극우, 권위주의, 독재’(루스 벤 기앳 지음, 글항아리, 2025)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실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고전적 폭정이 시민들을 단순히 억압하며 침묵시킨 것과 달리, 대중의 열정을 끌어모아 내적 정화와 외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향해 국민적 집결을 강화하는 데로 돌리는 기술을 찾아냈다.” ―‘파시즘’(로버트 팩스턴 지음, 교양인, 2005)

한국 사회는 1987년 이후 점진적이나마 꾸준히 민주화와 다원화 사회로 나아갔다. 군사 쿠데타나 계엄 같은 정치 후진국형 정변은 다시 없을 거란 믿음이 확고해 보였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국에서도 극우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집단 여럿이 존재해왔다. 해방 이후 반공을 기치로 활동한 정치세력부터, 특정 지역과 여성 혐오를 온라인 공간에서 확산시킨 일간베스트(일베) 온라인 커뮤니티 사용자, 이승만·박정희 권위주의 정권 시대를 향수의 대상으로 삼고 그 연장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 맞불 집회인 태극기 집회 참석자들, 극우 기독교 세력으로 불리는 전광훈씨를 주축으로 동성애·이민자·난민을 공격하는 세력까지 다양하다.” ―‘누가 한국의 극우인가? 한국 극우의 특징과 정치적 함의’(황인정 성균관대 좋은민주주의연구센터 선임연구원, 한국정치정보학회, ‘정치정보연구’, 2024년 6월)
위 논문이 발표된 지 불과 6개월 뒤, 한국의 극우는 윤석열 계엄과 탄핵심판이라는 ‘예외 상태’를 자양분 삼아 질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윤석열 계엄은 헌정 파괴도 불사하는 극우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아래 막말들은 차고 넘치는 사례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같은 평화 집회로 탄핵을 막을 수 있을까.(…) 지금쯤이면 곳곳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지며, 횃불과 가스통이 집회에 등장해야 정상이다.”(한정석 전 선거방송심의위원, 2월 22일 페이스북 게시글)
“공수처, 선관위, 헌법재판소, 불법과 파행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모두 때려 부숴야 됩니다. 쳐부수자!”(서천호 국민의힘 의원, 3월1일 서울 광화문 집회)
“문형배, 정계선, 이미선(민주당 추천 헌법재판관), 야 이 개××들아 당장 멈춰라. 대통령을 탄핵하면 나한테 죽어.”(오영석 목사, 3월1일 서울 광화문 집회)
“불법 탄핵 재판을 주도한 문형배, 이미선, 정계선을 즉각 처단하자.”(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구속 수사 중 옥중서신)
‘처단’이라는 단어는 12·3 계엄포고령에도 나온다.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 제14조(벌칙)에 의하여 처단한다.”
내란 세력이 말한 ‘처단’이 불법체포와 살해도 서슴지 않는다는 끔찍한 사실이 내란 혐의자들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12·3 계엄의 설계자인 민간인 노상원(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는 ‘수거 대상 처리안’이라는 항목에 “연평도 이송”, “이동 간 적정한 곳에서 폭파”, “확인 사살” 같은 메모가 적혔다.

앞서 1월19일 새벽 3시께, 윤석열 극렬 지지자 수백명이 윤석열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를 잡겠다며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했다.
우리 헌정사에서 사법부를 겨냥한 전례 없는 집단 폭력이었다. 꼭 4년 전인 2021년 1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대선 패배 결과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선동하자 2천여명이 폭도로 돌변한 연방의회 의사당 습격 사건의 판박이다.
“민주주의의 기반이 아무리 튼튼하다 해도 극단주의 선동가는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하기 마련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시험은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가가 아니라, 정치 지도자와 정당이 나서서 이런 인물이 당내 주류가 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 막을 수 있는가이다. 기성 정당이 두려움과 기회주의, 혹은 판단 착오로 극단주의자와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어크로스, 2018)
위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 교수들의 진단을 적용하자면, 집권당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권은 이미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 불통의 정치, 뉴라이트 중용, 검찰권의 무기화, 공영방송 장악 시도, 계엄선포권 오용 등 ‘민주주의 파괴자’라는 근거는 많다.
“일단 잠재적 독재자가 권력을 잡으면 민주주의는 두 번째 중대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 제도가 그를 통제할 것인가? (…)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한국 극우의 핵심 집단 중 하나가 개신교 일부의 극단적 보수 성향 분파다. 배덕만 목사(기독연구원 느헤미야 선임연구원)는 “전체적으로 한국 교회는 근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다”고 말한다. 송인규 한국교회탐구센터 소장은 극우파의 특징으로 ①극도의 편협성과 폐쇄성 ②편 가르기의 비열성 ③상대방을 정복·타도·파멸하려는 목표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이는 계엄과 탄핵 국면에서 드러난 개신교 극우파의 언동에서도 드러난다.
“2030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탄핵 반대 운동을 펼치는 수확을 거뒀다. 계엄령이 ‘신의 한 수’가 됐다.”(1월27일, 김진홍 목사, 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판사 검사들이요, 야 이 개××들아! 공수처 너희들 용서 못 해. 헌법재판소를 해체하겠습니다.”(3월4일,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사법 절차를 지키지 않는 헌법재판소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3월4일, 손현보 세계로교회 담임목사, 세이브코리아 대표)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신학적 근본주의가 정치적 극단주의로 변모했을까? 배덕만 목사는 불안과 공포, 기형적 신학, 지성의 상실 등 세 가지를 꼽았다.
“19세기 후반 이후 꾸준히 입국한 미국의 보수적 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에도 근본주의적 성경론과 종말론이 일찍부터 유행했다. 이런 신학적 근본주의는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통과하며 특정한 정치적·경제적 이념과 결합해 자신의 범주와 특성을 지속적으로 확장했다. (…) 특히 해방 전 한국 교회의 70퍼센트 이상이 있었던 평안도, 황해도, 북간도의 교인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갈등 후 대거 월남해, 반공을 국시로 내건 극우 정권을 끝까지 지지했다. 반공주의는 근본주의 신학과 함께 한국 교회의 핵심 도그마로 뿌리내렸다.” ―‘태극기를 흔드는 그리스도인’(배덕만 외 5명 지음, 한국교회탐구센터, 2021)
계엄·탄핵 정국에서 한국 극우는 가짜뉴스를 생산, 확산, 신봉하고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을 우기는 행태도 도드라졌다. 2월1일, 개신교 우파 단체 ‘세이브코리아’가 연 집회에서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는 “비상계엄은 법과 질서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계몽령’”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극우 집단에선 ‘계엄=계몽’이라는 궤변이 화두처럼 확산했다. 급기야 윤석열 탄핵심판의 변호인단에서도 ‘계몽 간증’이 나왔다.
“임신·출산·육아를 하느라 몰랐던, (더불어)민주당이 저지른 패악을, 일당독재의 파쇼 행위를 확인하고 이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몽되었습니다.”(김계리 변호사, 2월25일 헌법재판소 최종변론)
계몽.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표준국어대사전)이란 뜻이다. 같은 뜻의 영어 단어 ‘인라이튼먼트’(enlightenment)는 ‘빛을 비추다’(en + light)라는 어근에서 왔다. 그 빛이 계엄 선포 직후 국회를 침탈한 계엄군 헬기의 서치라이트와 특전사 군인들의 플래시 불빛일까, 계엄령이라는 두려움과 모멸감을 딛고 강추위 속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외친 2030 청년과 시민들의 응원봉 불빛일까.

한국 극우의 몽상에 가까운 독선과 타자 혐오, 가짜뉴스 맹신은 반지성주의적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반지성주의는 지식수준이나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반지성주의는 지적인 삶과 그것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의혹(…), 그러한 삶의 가치를 늘 극소화하려는 경향이다.” ―‘미국의 반지성주의’(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교유서가, 2017)
“반지성주의의 핵심은 지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지성의 작용에 대해 모멸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있다. (…) 정치권력은 우민화 정책을 실행하는 권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심정을 권력의 차원으로 끌어들인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다’ 중 시라이 사토시의 글(우치다 다쓰루 엮음, 이마, 2016)
미국의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짧고 강렬한 에세이에서 ‘개소리(bullshit)’와 ‘거짓말(lie)’을 구별한다. 둘 다 “부정확한 전달 또는 기만의 양상”이지만 개소리에는 “기만하려는 기획 의도”가 있으며, “자기 말이 맞든 틀리든 그 진릿값은 중심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 (…)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다.” ―‘개소리에 대하여’(필로소픽, 2023년 개정판)
윤석열이 내세운 계엄의 명분, 한국 극우가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며 쏟아내는 주장들은 어떻게 봐야 할까.
“권력형 개소리는 자신이 진리보다, 타인보다 힘의 우위에 있다고 간주하는 데서 비롯한다. (…) 권력형 개소리는 진리에 대한 무시와 타자에 대한 멸시라는 이중적 악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일반적 개소리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해악이다.” ―‘개소리에 대하여’ 옮긴이의 글

전광훈은 윤석열 탄핵 반대와 헌법재판소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국민저항권’을 외친다.
“국민저항권은 헌법 위에 있다. 국민저항권이 발동됐기 때문에 우리가 윤 대통령을 구치소에서 데리고 나올 수도 있다.”(1월19일 서울 광화문 집회)
극우화하고 있는 보수우파 일부 세력이 이른바 ‘계몽령’과 ‘국민저항권’을 주장하는 것은 적반하장과 아전인수격 궤변의 생생한 실례다. 국민저항권의 참뜻은 선출된 정치권력이나 공권력의 행사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민주주의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독재로 변질될 때 국민이 그에 맞서 저항할 권리다. 윤석열의 반헌법적 비상계엄과 그 지지자들이 내란 상태를 지속하려는 시도야말로 국민저항권의 대상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저항은 기본적인 권리이자 중요한 책임이다. 하지만 저항의 목표는 권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앞서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사건 선고에서, ‘저항권’ 행사의 세 가지 필수 요건을 명시했다.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 또는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고, 이미 유효한 구제수단이 남아 있지 않아야 하며, 그 행사는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회복이라는 소극적인 목적에 그쳐야 한다.” (2013헌다1,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
12·3 계엄 사태는 민주화 성취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도 어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동유럽사와 홀로코스트 전문가인 미국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예일대 교수)가 민주정의 취약성을 경고한 통찰은 곱씹을 만하다.
“우리가 참된 것과 매력적인 것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할 때 권위주의가 시작된다. (…) 파시즘은 지도자가 선택한 적이 모든 국민의 적이어야 한다는 거짓말이다. 그러면 정치가 감정과 거짓말에서 시작된다. 평화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부키, 2019) < 한겨레 조일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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