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던 그날의 위대한 기록
계엄 해제 막으려 했던 자들이 진짜 내란범이다
언론이기를 포기하고 공포를 중계한 확성기들

계엄 환영하며 내란 선동한 극우세력들의 광기
조희대는 법복을 입고 군홧발 닦아주려 했는가?
공범들을 단죄하기 전까지는 결코 끝날 수 없다

 

윤석열의 12.3 친위쿠데타가 발생한 지 1년이었던 지난 1주일 동안, 우리는 다양한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다시금 그날의 전율을 되새겼다. 국회 담장을 넘던 정치인들, 그것을 돕고 무장한 계엄군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시민들과 활동가들의 결기,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왔다.

 

대표적으로 1년 전 국회 앞으로 달려간 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민석 님의 어머니 김희정 님은 <뉴스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인은 자기 목숨을 함부로 할 수 없기에 죽지 못해 살고 있었는데, 그날 내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은 민석이에게도 떳떳하고 할 말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국회 앞으로 달려갔어요."

 

이태원 참사의 살인 주범인 윤석열이 더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에서, 그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가 그것을 막아 나선 게 '빛의 혁명'의 시작이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이런 분들이 우리 모두를 살린 셈이고, 다시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례이다.

 

1년 전 국회 앞으로 달려간 이태원 참사 희생자 최민석님의 어머니 김희정님 - 방송 화면 갈무리

 

그들의 용기는 분명 우리 공동체가 절벽 끝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1주년을 기념하며 우리가 ‘빛’을 이야기하느라 ‘어둠’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쿠데타를 기획하고, 동조하고, 손뼉 쳤던 ‘공범들의 밤’을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가장 먼저 기록되어야 할 치욕의 역사는 입법부 내부에 있었다. 알다시피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계엄 선포 앞에서 보인 행태는 ‘방조’를 넘어 ‘공모’였다. 계엄 해제 요구안 표결을 위해 본회의장으로 달려가야 했을 그 시간에, 그들은 종적을 감추거나 조직적으로 표결을 지연시키려 했다. 그들은 보루를 지키기는커녕 성문을 열어준 내부자와 다름없었다.

 

그들의 행위는 명백히 군사 반란 세력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정치적 엄호였다. 특히 추경호뿐 아니라 그날 국민의힘 대표실에서 계엄 해제 표결을 방해하고 막으려는 수상한 행태를 보인 8명의 의원이 모두 구속되거나 수사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성공한 쿠데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에 대한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날 밤의 공포를 증폭시킨 또 다른 주역은 언론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의 태도는 저널리즘의 사망 선고와 같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마자 그들의 온라인 속보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들을 앵무새처럼 읊어대는 데 급급했다. 비상계엄이 헌법적 요건을 갖추었는지, 절차적 정당성이 있는지를 따져 묻는 비판적 기능은 사라졌다.

 

그들은 계엄군의 이동 경로와 통제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며, 마치 시민들에게 "저항은 불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듯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명령을, 마치 날씨 정보를 전달하듯 무비판적으로 전달했다. 그날 밤 그들은 언론이 아니라 계엄사의 '대변인'이었고, 그들의 펜은 총칼보다 더 날카롭게 우리들의 공포를 파고들었다. 

 

당시 조선일보 뉴스 화면 갈무리 

 

더욱 섬뜩한 것은 극우 유튜버들과 일부 아스팔트 우파 정치인들의 반응 속도였다. 그들에게 12.3 계엄은 충격이 아니라 '환호'의 대상이었다. 2024년 가을 무렵부터 이미 징후는 나타나고 있었다. 일부 극우 채널에서는 '국가 비상 상황이 도래하면 우리가 기존 언론을 대신해 역할을 해야 한다'라는 식의 발언이 흘러나왔다.

 

이들은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그들의 방송은 단순한 지지가 아니었다. '빨갱이들을 소탕할 기회다' '싹 다 밀어버려야 한다'는 섬뜩한 언어들이 슈퍼챗과 함께 쏟아졌다. 황교안, 전광훈 류의 인사들은 즉각적으로 비상계엄을 지지하며 지지층의 행동을 선동했다. 극우 정치인과 종교인들은 이 광기의 굿판에 기름을 부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광화문으로, 용산으로 지지자들을 호출하며 내란을 선동했다. 국회에서 계엄이 해제되자 곧바로 2차 계엄을 요구하기도 했다. 가장 뼈아픈 대목은 국가를 지탱해야 할 핵심 기관들의 수상한 움직임이다. 검찰과 국정원, 그리고 사법부 최고 기관인 대법원마저 그날 밤의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탐사 보도들에 따르면, 계엄 선포 직후 대법원은 심야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고 한다.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 계엄의 불법과 위헌을 고발하며 막아서기 위함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계엄사령부의 임무 수행을 법적으로 뒷받침할 방안'을 논의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법복을 입은 채 계엄군의 군홧발을 닦아주려 했던 흑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검찰과 국정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이 계엄군과 어떤 정보를 공유하고 지원을 모색하며 체포 대상자 리스트 작성 등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정황 증거와 의혹 제기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가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이 국민을 보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국민을 겨누는 창이 되려 했던 그날 밤의 진실은 아직 빙산의 일각만 드러났을 뿐이다.

 

이 모든 일련의 흐름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있을까? 윤석열 정권과 이들 세력 사이에 사전 교감이나 치밀한 모의가 없었다면, 그토록 일사불란하게 톱니바퀴처럼 움직일 수 있었을까? 이들은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손짓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계엄 선포라는 신호탄이 터지자마자 각자의 위치에서 쿠데타를 지원하는 행동에 돌입했다고 보인다. 

 

유튜브 방송 화면 갈무리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어떠한가? 내란 수괴인 윤석열과 몇몇 핵심 공범에 대한 수사조차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위에서 언급한 부역 세력들에 대한 수사는 첫발도 떼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은 "언제까지 내란 타령이냐" "내란몰이는 지긋지긋하다" "이제 민생을 챙기자"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희대 대법원은 법원장 회의를 소집해서 내란 가담자 처벌을 위한 '특별재판부 설치' 논의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며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자신들의 혐의를 덮고 다가오는 심판의 칼을 막기 위해 법리를 오용하는, 전형적인 '법 기술자'들의 행태다. 알베르 카뮈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윤석열과 그 공범들을 끝까지 철저히 처벌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 바로 그렇다. 우리는 1년 전 그날 밤, 우리가 4.3 제주의 학살과 80년 광주의 피비린내 나는 상황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윤석열이라는 '머리'뿐 아니라 그 손발이 되어 움직인 자들까지 모두 찾아내어 역사와 법의 심판대에 세우지 않는다면, 12.3의 악몽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날 밤 우리가 거리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저들이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뼈에 새기듯 기억해야 한다. 쿠데타를 기획한 자, 동조한 자, 선동한 자, 그리고 법과 펜으로 그들을 도운 부역자들을 남김없이 찾아내 역사와 법의 심판대 위에 세워야 한다. 그것이 완료되기 전까지 우리는 단 한 발자국도 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 

                                                                                                         < 전지윤 기자 >